한국선교의 아버지 서상륜과 한국 최초의 목사는 김창식을 기억하자

에베소교회는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광복절을 맞아 한국 초대교회를 돌아보고, 에베소교회를 통해 한국교회 현실을 직시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자-윤영훈 교수 설교

윤영훈 교수의 “처음 사랑” 

(요한계시록 2:1~5)

 

오늘의 주제를 계시록에 등장하는 "처음 사랑"으로 정한 것은 단순히 첫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 무언가에 깊이 빠졌을 때의 그 마음가짐과 열정을 회복하는 것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이번 주에 8.15 광복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복절은 과거 한국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날이었고, 1910년대와 20년대의 한국인들에게 독립과 해방은 큰 희망이었습니다. 우리가 현재는 그때의 감정을 완전히 체감하기 어렵지만, 국권을 되찾은 감격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집니다. 특히 이번에는 광복절과 관련된 역사 논쟁이 있었습니다. 건국절, 광복절 등 여러 논쟁과 함께, 뉴라이트 사관 등의 새로운 역사관도 등장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 논쟁은 사회를 시끌시끌하게 만들었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치적 의견을 밝히기보다, 8.15를 기념하면서 우리가 어떤 것을 되새겨야 하고,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시대적 과제를 가져야 할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적 논쟁과는 별개로, 건국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긍정 서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광복절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제의 억압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기억 서사인데 이 둘의 균형이 중요한것 같습니다. 긍정 서사는 우리가 지나온 역사 속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고, 이는 우리의 자부심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반면, 기억 서사는 우리가 과거의 잘못과 아픔을 기억하고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오늘날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윤영훈 교수의 뉴사운드교회 설교

 

한국 현대사에서 기독교의 역할

 

한국의 현대사에서 기독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동안 기독교는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고, 3.1운동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에 33인의 민족 지도자 중 16명이 크리스천이었고, 이들은 교회와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 당시에 선교사들의 입장은 어떻했을까요? 조선은 당시 매우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나라의 주권이 변동하는 상황에서 이들(선교사들)의 목적은 조선의 독립이었을까요, 아니면 복음 전파를 통한 민족 복음화, 즉 한국을 복음화하는 것이었을까요? 종교적 목적이 훨씬 더 강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선교의 발판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내린 것은 ‘탈정치’였습니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교회에서 출교당할 정도로 엄격한 규율을 따랐습니다.

물론, 일부 선교사들은 한국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쓴 분들도 계셨지만,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한국의 정치적 문제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16명이나 되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그 운동에 참여했을까요? 이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단순히 종교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 나라의 역사적 상황과 시대적 사명을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세기 한국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 교회는 겉으로는 정교분리를 지향했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역사적 순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25 전쟁 때도, 산업화 시기에도, 군부 독재 시대에도, 그리고 IMF 시기에도 기독교와 교회는 결코 역사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1987을 보셨나요? 그 영화에서도 당시 기독교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국의 역사와 사회 상황을 무시하지 않고 시대적 소명을 인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현재 한국 기독교는 놀라운 성장을 이뤘고, 한국 사회도 크게 발전했습니다. 과거의 식민지 시절이나 가난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1960년 UN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GNP와 GDP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1961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국가 1위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믿기지 않겠지만, 불과 60년 전에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못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후, 우리는 엄청난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정말 놀라운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감동 깊게 읽은 책의 서문이 있습니다. 장하준이라는 경제학자가 쓴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의 서문에는 모잠비크라는 아프리카 나라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모잠비크는 작은 나라로, 산지가 많고 오랜 식민지 생활을 겪었으며, 내전으로 나라가 황폐화된 곳입니다. 이 나라는 매우 가난하여 큰 고통을 겪었고, UN의 빈곤 구호를 필요로 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출판된 2018년 기준으로, 모잠비크는 새로운 경제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주요 수출품이 첨단공학 제품으로, 우리나라처럼 반도체를 기반으로 한 국가 기간산업이 있었으며, 교육정책과 국가산업개발을 통해 급성장한 나라였습니다. 현재 그 나라의 국민소득은 3만 달러에 육박하며,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OECD 국가에 가입할 전망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서문을 쭉 읽다 보면, 마지막에 “2045년 뉴스”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이는 현재로부터 약 30년 후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가상이지요. 현재 모잠비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내전으로 황폐해지고 국민 대부분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과연 이 나라가 2045년에 OECD 국가가 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장하준 교수는 그때 그런 놀라운 기적을 이룬 나라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경제 서적입니다. 한국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신자유주의가 없었고, 각국마다 보호무역 정책이 치열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에 전자제품을 만들었을 때, 일본의 소니가 10만 원이고 한국의 LG가 10만 원이었을 때, 품질의 차이가 있었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소니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보호무역을 통해 우리나라의 산업이 보호받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국제 FTA를 통해 무역의 자유화가 이루어졌고,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보호무역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모잠비크가 30년 뒤에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산업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나쁜 사마리아인입니다. 마치 원조해주고 도와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영원히 선진국의 속국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경제적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를 되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한국의 성장은 “피와 땀과 눈물”의 결과

 

우리나라는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도 운이 좋았고,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여 산업 기반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케이팝이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현상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한국 아티스트들이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며, 한국 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이 현상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휩쓴 것은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러한 한국 케이컬처의 성공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우선, 한국 콘텐츠의 우수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한국적인 정서가 전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었으며, 특히 한국 드라마에는 시대적 정서가 녹아있어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IT 산업과 한국의 주요 산업들이 한국 콘텐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피, 땀, 눈물'입니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오징어 게임'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뒤 화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그 제작비였습니다. 외국에서는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을 만들려면 엄청난 제작비가 필요하지만,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도 가능했습니다. 1960년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가장 싼 것이 인건비입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이룬 비결은 바로 더 오래,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자원은 몸과 시간이었습니다. 자원도, 인프라도 부족한 상황에서 오로지 몸을 혹사하고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2010년대에도 문화산업에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피, 땀, 눈물'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방송국이나 콘텐츠 회사에서는 창의적인 발상과 함께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되었습니다. 외국에서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창의력이 발휘된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창의적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 치열한 경쟁이 존재합니다. 아이돌 가수들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조기교육을 받고, 매주 오디션을 보며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소수만이 데뷔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혹독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일종의 국가적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정서적 평화와 치유를 제공하며 긍정적인 서사를 심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개입으로 우리는 보호받았고, 우리나라가 이룩한 성과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믿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한국교회의 현주소

 

이제 에베소 교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매우 중요한 교회로, 사도 바울이 사랑한 교회들 중 하나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세계의 중요한 교회들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베드로가 개척한 예루살렘 교회, 두 번째는 바나바가 개척한 안디옥 교회입니다. 바울은 15장에서 바나바와 결별한 후 독립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하며, 고린도 교회를 선교 센터로 세우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후 2차 선교 여행이 끝나갈 무렵, 에베소에 들렀을 때 큰 가능성을 보고, 3차 선교 여행에서 에베소로 돌아와 3년간 목회하며 선교 센터를 건립했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기초부터 성도들을 교육하여, 우리 셀그룹 미니스트리처럼 탄탄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후 사도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선교 후원 교회가 바로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바울에게는 매우 애정이 깊은 교회였지요. 밀레도에서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때, 바울이 마지막으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눈물의 이별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누구를 후계자로 보냈을까요? 바로 그가 가장 사랑했던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각 교회마다 편지를 보내는데, 고린도 교회에는 두 개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많이 보내야 두 개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세 개의 편지를 보낸 교회가 어디냐 하면, 바로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서와 더불어 디모데 전서와 디모데 후서도 에베소 교회로 보낸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가장 사랑한 제자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처럼 여겼고, 그의 서신에서 그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격이 매우 까칠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디모데에 대해서는 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사랑을 보였습니다. 마지막에 디모데를 보고 싶어 하며, 그에게 큰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큰 기대를 걸었고,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베풀 필요가 없다고 결의한 후, 16장에서 디모데를 만나 그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이는 디모데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위대한 영적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애정을 담아 할례를 베풀고, 그를 젊은 인재로 키운 후 에베소 교회에 파송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고 우상 숭배자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등의 위기 속에서, 성도들이 단합하여 극복해 나갔습니다. 또한 아볼로 사건을 통해 요한의 세례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가 뜨거웠던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에베소 교회는 신약성서에서 교회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으며, 위대한 교회로서 그 서사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요한 사도는 뜻밖의 평가를 내립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여전히 번창하고 있었고, 그 당시 동아시아에 있는 모든 교회 중 가장 큰 교회였으며, 도시도 번창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이 말은 종교적인 행위는 분명히 있었으나,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이 한국 기독교, 한국 교회의 현주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을 한국 교회에 적용해보겠습니다. "한국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노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한국 교회의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며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맞습니다. 한국 교회는 복음 전파에 열심히 임했고, 신학 공부와 선교에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예배소 교회에 못지 않는 엄청난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정확히 한국 교회의 현주소가 에베소 교회의 모습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쯤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한국 교회의 첫사랑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덕주 교수의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최근 한국 교회의 상황을 반성하고, 과거의 열정과 헌신을 되새기기 위해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책을 추천합니다. 서문에 “이 책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이 땅에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며 영적으로 또한 민족적으로 우리민족을 깨웠는지 한국교회 1세대들의 회심이후 놀라운 열정과 삶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닮고 있다”라고 썼습니다. 이 책은 정서적 충격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아주 쉽고 매우 흥미롭고 감동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자는 감리교 신학자인 이덕주 교수입니다.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먼저, 주체적인 선교수용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은 선교가 이뤄지려면 그 나라에 선교사가 들어가고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현지인 지도자를 통해 성경을 번역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선교는 정반대입니다. 한국은 1885년에 선교사가 처음 들어온 나라로, 근대 선교 역사 가운데 가장 늦게 선교사가 입국한 국가입니다. 태국, 대만, 일본 등 주변의 모든 나라는 100년 전에 들어갔습니다. 19세기 말에 언더우드, 아펜셀러, 알랜 선교사가 들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현재 세계 제2의 선교 대국이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의 선교가 전 세계 선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만주에서 성경번역이 먼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들어오고, 보급되고, 성경을 읽은 사람들 중에 회심이 일어나서 황해도 소래에 1880년 최초의 한국교회가 현지인들끼리 세웁니다. 그리고 3년 뒤에 선교사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카톨릭도 그렇습니다. 1700년대에 처음으로 카톨릭 교리가 소개되었고, 이후 이벽과 이승훈의 노력으로 카톨릭이 한국에 확산되었습니다. 카톨릭 선교의 초기 역사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견디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절두산은 카톨릭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당시 카톨릭 신자가 13,000명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 8,700명이 죽임을 당한 병인박해 사건이 1860년대에 발생했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 군대가 조선에 쳐들어왔습니다. 당시 조선의 정치적 상황을 지휘하던 인물은 대원군이었습니다. 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펴면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서 배를 부수고 열심히 책들을 훔쳐서 돌아갔습니다. 그 책들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군대가 물리치고 나서, 제너럴 셔먼이라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타고 올라왔습니다. 그 상선은 조선에 들어와서 오만하게 행동하다가, 조선 땅을 침범하기 직전에 타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건이 1876년입니다. 그 당시까지 조선은 ‘선교 불가 지역’으로 여겨졌습니다. 지리적으로도 멀고, 선교사들이 들어가면 죽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카톨릭 선교사들이 사망했습니다. 

 

한국선교의 아버지 서상륜씨

 

조선은 실질적으로 선교 불가 지역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선교 불가 지역에서 무언가를 움직이셨습니다. 제가 소개하고 싶은 중요한 인물은 서상륜씨입니다. 그는 한국 선교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선교의 아버지를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로 생각하지만, 저는 이 기록이 잘못된 역사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1920년대 예일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백낙준 역사가가 쓴 ‘한국 선교사’라는 논문이 있는데, 그 논문은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제물포에서 부활절 아침에 도착했다고 시작됩니다. 이는 한국 선교의 시작을 이들 선교사 중심으로 서술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상륜이 중요한 인물입니다. 서상륜은 의주 상단의 장남으로, 만주와 함께 장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만주에서 병에 걸려 거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때 로스라는 의료 선교사가 그를 치료해주었습니다. 치료를 받은 서상윤은 로스 선교사의 성경 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누가복음을 번역했습니다. 이 번역본은 한국 최초의 성경 번역본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이 번역은 로스와 서상윤의 공동 작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상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경을 팔며 전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상단는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며 최초의 복음 전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출교시키고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이후 서상윤은 복음에 매진하며 한국 교회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황해도의 소례 지방에서 최초의 한국 교회인 소례교회를 세우고, 서울로 가서 종로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서상윤은 전도 활동 중, 조선에 선교사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선교사 집을 찾아가 언더우드를 만났습니다. 언더우드는 원래 인도 선교를 꿈꿨으나, 1882년 코넷티켓전도데회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는데, 메거진에 실린 한국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수정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가서 성경을 번역한 후, 감리교 선교국에 편지를 보내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올레이션스라는 월드 메가진과 선교 메가진에 실리면서 조선에서 오는 마케도니아의 음성으로 홍보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 선교사로 가려던 분들이 한국 선교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고, 장로교와 감리교, 원래 개혁교였던 선교사들이 함께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은 일본에서 번역된 것이며, 서상륜 버전은 만주에서 번역된 것이었습니다. 이수정의 성경 번역본을 들고 한국에 입국했을 당시, 언더우드는 한국어를 전혀 모르고, 한국에 대한 정보도 없었습니다. 그는 광혜원의 의료 선교사로 일하며 선교 방법에 대해 막막함을 느끼면서도 기도하며 일하던 중, 자신의 집 앞에 나타난 한 사람(서상륜씨)이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약 100여 명의 성도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머리를 밀고 있던 장면을 보고,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교회가 바로 새문안교회입니다. 서상윤이라는 이름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후 의주상단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아, 전 재산을 한국의 초창기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서상윤은 아무 욕심 없이 서울에서 일하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다시 황해도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며 평신도로서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는 그 이름이 완전히 잊혀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선교사 중심의 역사 서술과 목사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평신도의 공로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1907년 대부흥운동을 주도한 길선주 목사가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 한국 최초의 개신교 목사에 대해 묻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데, 카톨릭의 김대건 신부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국 최초의 개신교 목사는 모르는데, 그는 바로 김창식 목사입니다. 김창식 목사는 원래 머슴이었으나, 선교사의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며 배운 뒤, 1901년에 최초의 한국 감리교 목사로 세워졌습니다. 한국 교회의 초창기에는 낮은 자들, 즉 백정이나 머슴들이 신앙을 갖고 교회의 역사를 썼습니다. 예를 들어, 승동교회의 최초 장로는 백정 출신이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낮은 자를 위한 신앙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초기 역사는 노비, 백정, 깡패, 장애인, 부자, 양반, 유학자, 도사, 여성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던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강화도에서는 이름에 돌림자로 “일”를 써서 개명하여 공동체를 형성하는 역동적인 일들도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책에 실린 이러한 이야기들은 한국 기독교의 뿌리를 깊게 하고, 한국 교회가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줍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단순한 종교적 사건이 아니라, 나라가 절망의 시기에 새로운 정신적 희망과 각성을 가져다준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구국기도회와 같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는 시대적 소명을 가진 기도회였습니다. 나라를 살리고자 했던 초창기 한국 기독교는 단순히 개인적인 소망, 예를 들어 ‘부자가 되게 해 주세요’, ‘우리 아들이 서울대에 가게 해 주세요’, ‘좋은 직장에 취직되게 해 주세요’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는 민족적인 역사 의식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는 한국 기독교가 오늘날의 기적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정신적인 각성이 없이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기독교는 인구는 적었지만 많은 학교를 세우며 다음 세대의 인재를 배출했습니다. 이들 인재들은 우리나라와 한국 기독교에 중요한 유산을 남기며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처음 사랑은 처음의 설렘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 돌아보면, 에베소 교회가 수많은 수고와 인내를 기울였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노력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책망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처음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역사의 순환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큰 발전을 이뤘지만, 정신적으로는 큰 황폐함을 겪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숫자는 많지만, 이미 커진 교회의 덩치를 유지하기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현재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선교가 아니라 생존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뤄온 덩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뉴사운드 교회는 새로운 가치를 지니며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지역에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새로운 교회가 한국 기독교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처음 마음’과 ‘처음 행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처음 마음은 내가 그 일을 시작했을 때의 설렘을 의미합니다. 첫사랑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처음 직장에 출근했을 때, 학교에 입학했을 때, 첫 데이트를 했을 때의 설렘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처음에 대표기도를 하던 날의 설렘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기도문을 반복해서 연습하며 느꼈던 그 설렘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설렘은 처음 특송을 했을 때, 처음 설교를 했을 때의 두려움과 기대감을 포함합니다. 우리 마음속의 처음 설렘이 사라졌다면, 그 마음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 그 처음의 마음을 여전히 보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상기하며, 직장생활이나 가정에서의 사랑을 다시 돌아보고 처음의 설렘을 되살려야 합니다. 이 모든 처음 행위가 살아서 한국에서 영적 부흥을 이끄는 시대적 사명이 될 것입니다. 21세기 현재, 우리가 수행해야 할 사명은 정신적 진공상태와 황폐함을 극복하는 새로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통해 완수하는 뉴사운드 식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 설교는 유튜브 ‘뉴사운드교회’  2024년 08월 18일 1부 예배에서 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윤영훈 교수

성결대학교 신학대학원장

학력; Drew University 철학박사 (ph. D. STM)

       Ailiance Theological Seminary 신학석사(M.Div0, 성결대학교 신학과(Th.B)

주요저서: 문화시대의 창의적 그리스도인 (두란노, 2010)

       윤영훈의 명곡묵상 (IVP, 2016)

       비대면 시대 새로운 교회를 상상하다 (대한기독교서회, 2019)

       대중문화와 영성 (동연, 2022)

작성 2024.08.21 01:38 수정 2024.09.0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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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