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동산 투기 세력이 광기 들린 짐승처럼 날뛰고 있다. 아파트를 자그마치 150채 이상 가진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른다는 어느 통계 자료는 우리를 아연하게 한다. 우울하게 한다. 아니, 슬프게 만든다.
한 세대가 한 채씩만 가지면 됐지, 한 사람에게 그만큼 많은 집이 도대체 왜 필요한가. 이러니 한쪽으론 남아도는데 다른 한쪽으론 여전히 모자라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모르긴 해도 자본주의의 병폐이며 자본주의 제도가 지닌 모순이 아닌가 한다.
집을 수백 채나 가진 사람들은 한마디로 정신병 환자임에 틀림이 없다 싶다. 소갈증을 앓는 사람이 밤낮 주야로 물을 마셔 대도 목마름이 가시지 않듯, 재물에 대한 욕망은 아무리 충족되어도 그 갈증이 끝내 해소되지를 않는다. 150채로도 만족 못 하고 160채, 170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게끔 되어 있다. 이것이 과도한 욕망의 병을 앓는 이들의 공통된 속성이다. 그리하여, 그만큼 많이 가졌으면서도 자신은 그 사람들보다 불행하다고 여기며 괴로워한다.
하나의 세대가 한 채 이상의 집을 차지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워두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나머지 집들은 어차피 다른 사람이 살도록 빌려주어야 한다. 노상 빌려주고 되돌려 받고 빌려주고 되돌려 받고……, 백 채가 넘는 집을 그리 하다 보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 하고 매일같이 그 많은 애물단지 관리하다가 평생을 마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들은 비록 생활은 부요富饒할지 모르겠지만 삶은 가난을 면치 못하는 이들이다.
이처럼 극단적인 사례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도나도 시쳇말로 대박을 꿈꾸며 아파트 투기 대열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 이즈음의 형국이다.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이상 어느 누구도 거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게다. 그 대열에 동참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 것처럼 심한 상실감으로 우울해한다. 부동산 투기 열풍이 바야흐로 전 국민을 ‘정신병 환자’로 만들어 가는 중이다. 번연히 타 죽게 되는데도 무작정 불구덩이를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모두들 부동산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중국 속담에,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집이 아무리 많다 한들 온전한 가정 하나가 없다면 그것을 과연 행복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내남없이 소유 양식의 삶에 온통 정신이 빼앗겨 존재 양식의 삶은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물질에의 지나친 집착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을 좀먹히고 있는 것이다. 장차 이 끝이 어찌 될는지…….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김규련수필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