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0년 차에 처음 여름휴가를 떠났습니다. 휴가라기보다는 주말을 이용한 1박 2일의 조금 긴 외출이었습니다. 휴가철이 아니어도 원하는 시간대에 원하는 좌석을 예약하려면 적어도 3주 전부터는 서둘러야 합니다. 주말여행은 더 부지런해야 가능하지요. 게다가 모든 예약이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니 아날로그 세대인 저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부담을 감수하고 어렵게 예약했는데, 남편은 귀찮다거나 다른 일정이 생겼다는 이유로 너무나 쉽게 취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예약보다 취소가 왜 그리 더 어려운지요. 잘못해서 예약금만 날려 버릴까 전전긍긍하다 결국은 남편하고는 정말 어떤 곳도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포기합니다.
남들보다 체력도 약한데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남편의 피곤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서운할 때가 더 많은 건 사실입니다. 해마다 보약도 준비해 보지만 그리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나마 그 보약 덕에 지금까지 특별히 아프지 않고 잘 견디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 남편이 어느 날 심장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가야만 했습니다. 어떤 증상에서든 병원에 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뇌나 심장에 이상이 있어 병원에 간다는 것은 더 절망스럽고 두려운 일 이었습니다. 다행히 위험한 상태는 아니어서 협착된 부위의 혈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스탠트삽입 시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실로 남편이 들어가고 혼자 그 앞을 서성일때 세상이 멈춘 것처럼 주위의 소음도 그 어떤 움직임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보다 더 병원 가는 것을 싫어했던 남편이 혼자서 수술대에 있을 것을 생각하니 남편의 두려움이 그대로 느껴져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때 수술실 문 유리에 엉거주춤 서 있는 왜소한 중년 여자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작은 키는 아니지만 마른 체구로 평소에 왜소하다고 느꼈던 남편의 모습이었습니다. 저희 부부의 닮은 꼴을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남편이 언제나 강하고 든든한 존재이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약한 모습에 제 불안감이 커질 때면, 질타나 분노로 그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자유라는 열망을 핑계 삼아 헤어질 결심을 하곤 했습니다. 그것만이 저의 후반기 인생을 편하게 해줄 희망이라며 반응도 없는 저항을 해왔습니다.
막 시술을 받고 나온 남편이 겁먹고 있는 저에게 눈맞춤 없이 한마디 건넸습니다.
“여보 나 이제 아이언 맨이 되었네요”
표정이 없는 남편의 어색한 농담이 때론 진담처럼 들려 저를 헛갈리게 할 때가 있습니다. 긴장하고 있는 제 앞에 마취 상태도 아닌 온전한 정신으로 나온 남편의 상태가 반갑고 고마워 막 눈물이 나려는데 어처구니 없는 그 한마디에 전 그만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 아휴 이 상황에 뭔 그런 썰렁한 개그를 해요”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간호사가 대신 웃어주며 절 안심시켰습니다.
농담으로 던지는 그의 아이언 맨은 건강하고 강한 사람이 되고 싶은 남편의 희망이자 다시 절 지켜줄 수 있다는 긴장한 아내와 자신을 위한 어설픈 위트였습니다.
그런 남편의 진심은 농담 거치대를 통해 제 마음으로 기대왔습니다.
그런 남편이 가장 무덥다는 이번 여름에 부산으로의 하루 여행을 제안했습니다. 그렇지만 또 어떤 핑계를 대며 취소할지 몰라 망설였지만, 어느새 저는 또 머리를 조아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기차와 호텔 예약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수서역에서 먼저 출발하고, 22분 후 남편은 근무지에서 가까운 지제역에서 기차를 타기로 했습니다. 기차 안에서의 조우가 아닌 비록 정해진 만남이지만 처음 해보는 이런 약속이 신선했습니다. 기차에서 점심으로 먹을 도시락과 음료를 준비하며 오랜만에 기차여행만의 묘미도 느꼈습니다. 남편은 제가 서울에서 기차를 잘 탔는지 전화했고, 지제역에 도착해서는 기다리고 있다고 또 전화했습니다. 짧고 간단한 확인 전화였지만 남편의 목소리는 제 마음처럼 고양되어 있었습니다. 남편이 기다리는 지제역까지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묘한 설렘이 레일 위를 저와 함께 달렸습니다.
드디어 지제역에 열차가 도착했고 자동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기차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람한 젊은 청년들 사이에 끼어 열차 안으로 들어선 남편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낮설지만 왠지 익숙한 얼굴이라고 알아채기까지의 멈춤이 제게 필요했었나 봅니다. 처음 만났던 24살의 남편 모습을 기다리며 찾고 있었던 순간의 추억 시간이 말입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시나, 혹시 나 찾는 겁니까“
” 여기서 사람들이 많이 타네요“
저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표정을 감추려 동문서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 내가 아무래도 기억에 문제가 있나봐요.’
의자에 앉으며 남편도 동문서답을 합니다. 그때그때 대답 대신 자기 할 말을 하는 것, 저희가 자주 사용하는 대화 패턴입니다. 그래도 대화의 끝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왜요:‘
”내 약을 안 갖고 왔네.“
“아휴 매일 먹는 약을 잊어버리면 어떡해요. 그거 먼저 챙겼어야지. 아이언 맨 되는 거 한 번이면 족해요.”
“당신 약 챙기느라 잊어버렸네. 소화제에 혈압약, 그리고 치통약이랑.”
“난 안 먹어도 되는 건데 매일 먹어야 하는 약부터 챙겼어야지요”
“나한테는 언제나 당신이 먼저잖아요”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남편이 웃었습니다.
남편이 챙긴 저의 약 또한 없어서는 안 되는 약 이었습니다. 저 또한 남편에게 필요한 물품과 도시락을 챙기느라 저의 약을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마음에서 놓아버리는 찰나, 곧 배려와 사랑의 순간이었습니다. 비록 연민이라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연민 없는 사랑 또한 말할 수 없으니까요.
한여름에 떠나보는 여행의 기대감과 즐거움이 남편을 미소 짓게 했습니다. 전 그런 남편의 미소를 보며, 이제 이대로면 족하다고 소리없이 말해줍니다. 남편의 대답인 듯 기차가 길게 경적을 울리며 달렸습니다.
- 황혼이 아름다운 세상 모든 부부의 이야기 입니다.
K People Focus 표서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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