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서를 훌쩍 넘긴 가을 문턱이지만 늦더위가 아직 집요하다. 청량(淸凉)보다는 명징(明澄)이다. 메숲졌던 산야는 점점 푸름을 잃어가고 열기가 한층 꺾인 하늘은 슬슬 수채화를 닮아간다. 강가 노송 숲 사이를 빠져나온 바람이 논두렁에 핀 허연 망초꽃 무리를 뒤흔든다. 길섶 산수유 진 자리에 울음처럼 맺힌 붉은 열매가 눈 시리다. 감물 든 베적삼처럼 오래된 그리움이 멍울져온다.
나지막한 산등성에 종굴박 같은 무덤들이 등고선처럼 늘어서 있다. 한 집안의 내력을 품은 선산이다. 잠자는 영혼을 위무하듯 고추잠자리 날갯짓들이 물기 마른 허공에 부산하다. 여름을 먹고 자란 잔디가 수풀처럼 출렁이고, 바람 타고 흘러든 이름 모를 방초들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꽃향기를 잔뜩 품고 있다. 벌초하는 오늘이 없었다면 사람 발길 끊어진 폐가처럼 쑥대밭이 되기에 십상이다.
‘묘지에 가면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죽은 영혼들 사이에서 위안과 충만을 느끼는 것은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하지만 생명의 한계가 있는 인간들이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면 어쩌면 당연한 정서가 아닐까도 싶다. 외국에서는 동네 가까이 공동묘지가 자연스럽고, 드넓은 잔디밭에 공원묘지를 겸하기도 하고, 집안 마당에 묘지를 두는 나라들도 있다고 한다. 어릴 때는 어둡고 무거운 장소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애틋해지는 것은 나에게도 죽음이 가까워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각지에서 일가친척들이 모여든다. 형제이고 부모이며, 당숙이고 조카들이다. 일 년에 한 번 보는, 정겹고 반가운 혈육이다. 윙윙대는 예초기 소리를 선두로 제각기 낫이나 갈퀴를 들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조상님들 쉼터를 내 손으로 꼭 단장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모두 한결같다. 멀리서 오는 가족들이 뒤늦게 산소에 도착할 때마다 참새 떼처럼 우르르 몰려가 왁자지껄 인사와 웃음을 나누고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봉분이 제 모습을 드러내자 잘 깎아놓은 밤톨처럼 생전 아버지 모습 그대로다.
맨 꼭대기 증조부 묘소부터 제절 아래 식구들이 모여 선다. 나이순, 항렬 순으로 두 겹 세 겹으로 정렬한다. 얼굴도 모르는 비문 속의 조상이지만 시제를 지내는 마음은 사뭇 경건하다.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숙연한 추모의 마음을 더 보탠다. 자손들 한 해 건강하고 평안하게 돌보아주심을 감사하고 또 내년의 무탈을 기원한다. 바쁜 와중에도 조상을 찾는 자신의 정성이 그대로 전해지리라 기대해본다.
제를 지내는 경건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하지만 앞니 빠진 빈자리처럼 뭔가 아쉬움과 허전함이 밀려온다. 참석하는 인원도 많이 줄었고 특히 젊은 자손들이 별반 보이지 않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번거롭다는 이유로 갈수록 벌초나 제례 행사에 소원해지고 있다. 아장대는 손자 손녀들까지, 새로 들인 젊은 며느리들까지 찾아와 복작거렸던 그 시절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갈수록 가족 수는 더 줄어들 텐데 지금 장년층이 사망하고 나면 이 선산을 누가 돌볼지도 지레 염려가 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사회가 급속히 개인주의화 되고 편리함을 우선하면서 덩달아 조상 모시기도 고리타분한 옛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결혼이나 출산을 꺼리면서 기초적인 가족 개념마저 해체되고 있다. ‘나 홀로’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설사 가족이라고 해도,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피로감을 줄이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는 의식이 젊은이들 사이에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한 하늘 아래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서, 각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다.
장례 방법도 화장이나 수목장으로 대체되면서 후손들이 찾아갈 흔적마저도 만만치가 않다. 최근 들어 미국에서는 환경오염과 토지 부족을 이유로 시신을 묻거나 태우지 않고 땅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시신 퇴비화 장례’도 도입되었다고 하니 인간 존엄성마저 의미가 없어져 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정보 기술과 생명 기술, 쌍둥이 혁명을 겪고 있는 21세기 인간의 삶은 얼마나 달라질지 궁금하다. 가상 인간과 디지털 인간의 현실화, 인공지능사회와 기계 인간 시대가 기세 높게 다가오고 있다. 이번 세기 중에 알고리즘을 통한 인간 내부의 통제와 생명의 설계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경험은 데이터로 완벽하게 정리되고, 인간의 사유와 감정조차도 AI의 인도와 지시를 받게 될 운명이다. 만일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류종족이 출현하게 된다면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인간이 건설해온 세상과는 판이한 모습이 될 것이다.
물러나는 세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고 한편으론 무섭기까지 하다.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한다고 해서 인간만이 가진 신뢰와 믿음이라는 미덕 또한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난다. 기계는 기계의 몫이 있겠지만 인간은 인간의 영역을 지켜나가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기계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퇴화가 아니라 진화의 한 과정이기를 기대해볼 뿐이다.
부모와 조상을 추모하는 행사도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옛날 방식은 새로운 시대 앞에서 자꾸만 진부해지고 볼품없어져 가고 있다. 불편하고 부족했지만, 결코 결핍하거나 불행하지 않았던 그 시절은 아무런 근거도, 가치도 없는 일이 되고 있다. 조상의 권위가 싫어서 제사와 같은 문화를 멀리한다지만 오히려 인간의 가치와 존엄은 기계문명 앞에 힘을 잃고 있다.
형제자매와의 만남도 자꾸만 줄어든다. 일가붙이라고 해서 안부가 궁금하고 인사차 전화 한 통도 옛일이 되었다. 부모님마저 안 계시면 명절도 없고, 형제라는 우애도 아예 잊고 살지도 모른다.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도 없고 이웃과 함께 어울리는 정도 없다. 반려동물과는 가족의 일원으로 정서적 교감이 늘어나는 반면 진짜 인간으로서의 가족관계는 자꾸만 멀어져만 가고 있다. 해마다 줄어드는, 보이지 않는 혈육들을 기억으로만 찾는 것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나마 찾아갈 곳이 벌초 행사였다. 산소는 육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보다 혈육 간에 얼굴이라도 잊지 않고 사는 매개체가 되는 것 같다. ‘효’는 말보다 손발이 먼저일 테다. 조상에게 예를 지키는 일이 형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몸으로 앞장서 구하고 얻으려 하지 않고서 마음이 통할지는 의문이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 행복해지자고 태어났는데 과연 옛날보다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무엇으로 살맛이 나고 무엇으로 좋아졌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다. 편리가 문명을 재촉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정서와 영혼마저 빼앗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족도 없고, 효도 없고, 우애나 정도 모르는 그런 생활이 기계 아닌 인간의 삶에 과연 행복한 일일까. 그런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말이 있다. 특별한 놀잇감도 없는데 형제가 종일 재미있게 지내고, 훗날 사촌 간에 잘 지내야 한다며 방학이면 친가나 외가로 보내 서로 어울려 지내도록 했던 부모님의 배려가‘신기한 일’이 아니라 진정 ‘사람 사는 일’이 아니었던가 싶다. 행복을 찾아 저마다 달려가고 있지만 인간다운 삶이 지속 가능한 보편적인 가치가 바탕이 되었으면 좋겠다.
해가 중천을 넘어서자마자 자기 시간, 자기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족들이 다시 뿔뿔이 흩어진다. 길이 멀거나 할 일이 많다는 이유에서이다. 몇 시간쯤, 하루쯤같이 머물며 정을 나눌 여유가 현대에는 없다. 한 모금 음복마저도 음주운전 때문에 사양이다. 안부를 넘어 서로의 삶을 옹호하고 상처를 위로해줄 마음도, 노력도 없다.
이제 여기 선산에도 가을이 깊어질 것이다. 바닥에 나뒹굴던 낙엽이 참새 떼같이 종종걸음을 치고 겨울 허수아비같이 곧 바스러질 것 같은 허무가 찾아올 것이다. 밤하늘 홀로 떠 있는 달빛처럼 그리움의 허기가 음영처럼 드리워질 것이다. 동안거에 들어가는 수도승처럼 조상님들도 긴 겨울날을 낯설게 지내며 다음 해 벌초하는 날을 목 놓아 기다릴 테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