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커다란 전투였다. 이 가운데 진주대첩은 1592년 10월 4일 ~ 10월 10일(음력)에 벌어진 전투로서 '제1차 진주성 전투'로도 불린다.
진주목사 김시민, 진주판관 성수경, 곤양군수 이광악 등의 지휘부 아래 3천~4천 명 규모의 조선군이 합심하여 약 3만 명의 일본군을 물리친 매우 극적인 전투로서,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을 좌절시켜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다.
진주대첩의 전쟁 영웅 가운데 한 명인 곤양군수 이광악이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곤양은 본래 경상우수영 소속 관포(官浦)에 속한 고을의 하나이다.
따라서 곤양군수 이광악은 본래 진주대첩이 벌어진 시기에 조선 수군에서 활동했어야 했지만, 임진왜란 초기 육군과 수군의 징병 상황이 혼란스러워 육군으로서 진주대첩에 참전하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곤양군수 이광악이 진주대첩에 참전한 것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광악의 자는 진지(鎭之),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광주(廣州), 생몰년은 1557년~1608년이다. 『난중일기』에는 곤양군수 이광악의 이름이 1594년부터 등장하는데, 아마도 육군과 수군의 징병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또한 한산도가 통제영이 되면서, 곤양의 군사가 본래 속했던 경상우수영으로 다시 돌아갔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다음은 이광악의 이름이 나타나는 『난중일기』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4년 4월 21일
저녁에 김성숙(김경로)과 곤양군수 이광악이 와서 만났다.
[원문] 夕 金惺叔及昆陽李光岳來見.
『난중일기』, 1594년 4월 23일
늦게 곤양군수 이광악이 술을 가지고 왔다. 장흥부사(황세득)도 왔는데 임치첨사(홍견)가 함께 왔다. 곤양군수(이광악)가 몹시 취해서 미친 소리를 해대어 우스웠다. 나도 잠시 취했다.
[원문] 晩 昆陽李光岳 持酒來. 長興亦來 臨淄同來. 昆陽醉極 散發狂言 可笑. 吾亦暫醉.
1594년 4월 23일 일기를 보면, 당시 곤양군수 이광악이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렸는데, 이순신은 단지 우스웠다고만 표현하고 자신도 조금 취했다고 서술하였다. 아마 이광악과 어떤 친분관계가 있었거나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같은 해 8월 17일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조금 더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난중일기』, 1594년 8월 17일
흐리고 저물녘에 비가 내렸다. 원수(권율)가 12시경에 사천에 이르러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청하기에 곤양군수(이광악)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무르는 사천현감(기직남)의 거처로 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례를 하고 이어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오해가 풀리는 기색이 많았다. 원 수사(원균)를 몹시 견책하였는데 원 수사가 고개를 들지 못하여 우스웠다. 가지고 갔던 술을 마시자고 청하여 8순을 돌렸는데 원수가 몹시 취해서 헤어졌다. 헤어져 숙소로 돌아오니 박종남과 윤담이 와서 만났다.
[원문] 陰暮雨. 元帥午到泗川 送軍官邀話 故騎昆陽馬 進于元帥所駐泗川倅接處. 行敎書肅拜後公私禮 因而同話 多有解情之色. 甚責元水使 水使不能擧頭 可笑. 持酒請飮 行八巡 元帥極醉而罷. 罷還宿處 則朴宗男尹潭來見.
1594년 8월 17일 일기는 통제사 이순신이 도원수 권율을 만나기 위해 경상도 사천으로 간 상황을 기록하였다. 이순신은 재미있게도 곤양군수 이광악의 말을 빌려 타고 권율을 만나러 갔다. 단순히 상급자로서 하급자의 말을 빌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친분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 또한 엿보인다.
여기서 일기의 내용에 나타난 박종남(朴宗男)이라는 인물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박종남의 자는 자윤(子胤), 본관은 밀양(密陽), 생몰년은 1549년~1601년이며, 니탕개의 난에 참전한 이력이 있고, 이순신과는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한 급제 동기이다. 주목할 점은 박종남과 이광악은 사돈이 되는 관계라는 사실이다.
박종남은 밀양박씨 사문진사공파 파조 박원(朴元)의 15대손으로서, 그의 족보인 『밀양박씨사문진사공파세보』에 따르면 박종남의 장남 박영신(朴榮臣, 1578~1624년)은 이광악의 딸(1575~1626년)과 혼인하였다. 이광악의 족보 『광주이씨족보』에서도 이광악의 장녀가 박영신과 혼인한 기록이 확인된다. 참으로 인간관계가 묘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1595년 『난중일기』에는 이순신과 이광악의 관계를 더욱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5년 6월 8일
늦게 세 조방장이 와서 만났는데 곤양군수(이광악)가 상을 당했다고 전하여 매우 한탄스러웠다.
[원문] 晩 三助防將來見 傳昆陽奔外憂 可歎可歎.
위 내용에 묘사된 이순신의 감정은 이순신과 이광악이 단순한 업무 관계 이상임을 보여준다. 이광악의 족보인 『광주이씨족보』는 그의 아버지 이호약(李好約)이 을미년(1595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위 『난중일기』가 기록된 시기와 일치한다.
[참고자료]
『밀양박씨사문진사공파세보(密陽朴氏四門進士公派世譜)』
『광주이씨족보(廣州李氏族譜)』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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