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맛있는 수요편지 김정하입니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어느샌가 사그라들고 아침 저녁으론 공기에 찬 기운이 서려있네요.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기 좋은 날 입니다.
구름처럼 바람따라 살고 싶지만 다이어리에 일정과 할 일을 적어두고, 약속 시간을 항상 체크하는 계획형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인생엔 변수가 많다보니 아무리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도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병원 검진 예약에 맞춰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데 계기판에 붉은색 경고가 떴습니다. 병원으로 가던 방향을 정비소로 바꿔 차를 맡긴 후 택시를 타고 오전 진료시간에 맞춰서 부랴부랴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지금 검진할 시기가 아니라 다음에 오라는 말을 듣고 돌아나왔습니다. 정말 계획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는 날 이었습니다.
이렇게 일정이 틀어져 버리면 짜증이 많이 납니다. 계획을 세우면서 쏟았던 시간과 기대했던 마음, 뒤로 줄줄이 만들어 뒀 던 다른 일들까지 다 엉망이 되버린 것 같아 하루를 완전 망친 기분입니다. 헌데 그 날은 마음이 꽤 괜찮습니다. 갑자기 높아져버린 하늘과 구름 덕 일까요. 차 없이 나와서 홀가분한 마음에서 일까요.
병원 근처에 주차가 불편해서 가기 어려웠던 쌀국수집이 생각났습니다. 사람으로 꽉 찬 식당에서 10여분 기다렸다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고기가 듬뿍 들어간 쌀국수를 먹으니 지난 겨울 베트남 여행에서 먹었던 쌀국수가 생각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옆에 있는 카페 겸 서점에도 갔습니다. 저의 마음을 위로해줄 책을 고르고, 진저에일을 마시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골목에 있는 아주 작은 디저트 가게에 갔습니다. 무화과 얼그레이 조각케이크를 사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분명 정비소로 가는 차 안에서 엉망인 하루를 보낼 것 같았는데, 오히려 소풍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소풍은 한자로 노닐 소(逍)에 바람 풍(風)을 적습니다. 바람을 쐬러 놀러간다는 뜻이겠죠. 바람이 들어 갈 수 있는 여유가 있는지가 포인트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에 간들 바람 한 점 불어넣을 마음이 한 켠이 없다면 소풍이라 할 수 없겠지요.
매일 빡빡한 일상 속에서 도미노처럼 일정을 관리했다면 실수로 넘어진 하나가 모든 도미노를 쓰러뜨리듯 오늘 하루가 엉망이 됐을 수도 있겠죠. 도미노와 도미노 사이에 충분한 공간이 있으면 하나가 넘어져도 그 뒤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엔 모든 시간에 할 일을 채워넣는 것을 계획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번의 도미노를 망가트리고 나서야 휴식도 계획에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진저에일을 추천하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진저에일이 이름만 들으면 술 같지만 사실은 생강맛 탄산음료입니다. 손쉽게 마트에서 사서 마실 수 있고, 탄산수에 생강청을 넣어 만들 수도 있습니다. 진저에일을 마시며 술은 아니지만 에일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느슨함에 기대어 마음을 조금 덜어 놓아 보세요. 비워 둔 공간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 멋진 하루를 보낼 수 있을꺼예요. 바람은 계획할 수 없으니 미리 덜어 놓고 기다려 볼까요.
K People Focus 김정하 칼럼리스트 (ueber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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