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가 멈추는 날’은 같은 이름의 1951년 영화를 다시 만든 2008년 개봉된 미국 공상과학 스릴러 영화로 영화 속 주인공 외계인 클라투 역을 맡은 키아누 리브스가 이런 말은 한다.
“지구가 멸망하면 인간도 사라지겠지만 인간이 사라지면 지구는 살 수 있다”
2007년 출간된 ‘우리가 없는 세상’은 저자인 미국 언론인 앨런 와이즈만이 인간이 갑자기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지구 자연과 인공 환경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인가에 대해 쓴 논픽션 책이다. 저자는 샘플로 우리 한반도 휴전선 DMZ와 전(前)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SSR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1986년 4월 26일 (모스코바 기준 시간) 발생한 폭발에 의한 유출 사고 지역을 그 예로 들었다.
이 같은 영화와 책이 나온 지 10여 년 만에 온 인류는 코비드19 코로나바이러스 역병으로 인간의 물질문명이 망해야 죽어가든 지구와 자연환경이 소생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고 있지 않은가. 이는 마치 몇 년 전부터 항간에 유행어로 회자되기 시작한 푸념을 상기시키지 않는가.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느니 ‘절이 죽어야 부처가 산다’느니, 말하자면 ‘사람이 죽어야 신(神)이 살고 우주자연이 산다’는 풍자이리라.
2015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의 주제는 인간과 인간의 연결을 넘어,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초연결’이었다. 사물 인터넷 기술이 점차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20여 년 전 바르셀로나를 방문했을 때 건축계의 이단아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물들을 보고 내가 받은 인상은 그동안 본 서양의 건축양식과는 전혀 다른, 나무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명언 “직선은 인간의 선(線)이고, 곡선은 신(神)의 선”이란 말에 수긍이 갔다. 그가 곡선이 ‘신의 선’이라 했다면 이는 ‘우주 자연의 선’이란 뜻이다. 서양문명과 종교가 부자연스럽게 직선적이라면 동양문화와 사상은 곡선적이라 할 때, 가우디는 동양적인 예술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특히 나무로 상징되는 자연을 사랑한 예술가란 말이다. 2015년 11월 15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묻고 CNN Tonight News의 흑인 앵커 돈 레몬은 대답한다.
“내가 보기엔 당신은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은 것 같던데…”
“맞다. 감정이 상하거나 방어적으로 수세를 취하는 대신 나는 왜 저 사람이 저렇게 느낄까. 왜 저런 의견을 갖고 저렇게 생각할까. 호기심을 갖고 나는 대응한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당신처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자신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대안(代案)이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항상 자기 회의를 하지 않는가”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 말을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뉴욕타임스는 ‘인공지능의 미래’라는 제하의 특집을 냈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테크놀로지 기술이 계속 개발되고 확장될수록 우리 삶에 그 더욱 큰 충격을 주게 된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를 갖고 과학적으로 새로운 발견이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면 새로운 발견이 무엇을 초래할 것인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인가. 그 예를 들자면 기계가 음식 맛을 보고 요리사를 훈련시켜 음식물의 낭비를 줄이고 신선도를 높일 수 있게 될 것인가. 또는 현재 우리가 엄마나 아이에게 아니면 개나 고양이에게 전화해 집안일을 챙기듯 로봇과 교신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인공지능을 통해 대양의 숨은 비밀을 알아내고 그 자료를 분석해 멸종 위기에 처한 고래를 보존하고 대양의 오염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또는 운동선수와 팀에게는 물론 스포츠 도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겠는가 등이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영화산업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복잡미묘한 관계 ‘본드’를 자세히 검토해오지 않았는가. 또 다른 예로 미국 몬태나주 롤로에 있는 ‘붉은 색연필 필사본’ 창업주 엘리 레오나드는 언어의 뜻을 해독함에 있어 컴퓨터를 사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과학자들은 기계로 하여금 ‘상식’을 개발케 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고 있단다. 이는 인공지능의 미래는 스스로 자습자득 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에 달렸다는 결론이다. 일반적으로 ‘인공지능’이라 하면 인간의 지능을 갖고 있는 기능을 갖춘 컴퓨터 시스템으로 인간의 지능을 기계 등에 인공적으로 시연(구현)한 것을 뜻한다. 아울러 그와 같은 지능을 만들 수 있는 방법론이나 실현 가능성 등을 연구하는 과학 분야를 가리키기도 한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그렇다고 치자. 그보다 더 절실히 절박하게 필요한 건 자연지능을 시급히 회복하는 게 아닐까. 몇 년 전 미국에선 출판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크게 물의가 일었다. 1990년 출간된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수 많은 독자들의 애독서가 되어 온 미국 작가 하퍼 리(1926-2016)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정의로운 변호사로 자녀들의 롤모델이었던 애티커스 핀치가 55년 만의 신작 ‘파수꾼’에서는 인종주의자로 묘사되어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치듯 쏟아졌었다.
뉴욕타임스는 ‘앵무새 죽이기’보다 2년 전에 쓰여진 습작 같은 ‘파수꾼’에서 ‘앵무새 죽이기’ 같은 고전적인 걸작을 끌어낸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음을 심층 취재해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이 숨은 역할을 한 사람은 ‘앵무새 죽이기’ 편집자 터리즈 폰 호호프 토리(1899-1974)로 직업상으로는 테이 호호프로 불렸다. 짐작건대 저자 하펴 리가 20대 젊은 날에 쓴 원고 ‘파수꾼’을 읽고 편집자 테이 호호프가 그 어둡고 부정적인 내용을 독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고쳐 쓰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했으리라.
‘파수꾼’에서 백인우월주의자의 테러 단체 KKK에 가담하고 인종차별제도 폐지를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깜둥이가 차떼기로 우리 학교, 우리 교회, 우리 극장에 몰려오면 좋겠느냐?”고 딸 진 루이스 핀치, 별명은 ‘스카우트’에게 소리 지르는 인종주의 골수분자 애티커스가 ‘앵무새 죽이기’에서는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남성을 감동적으로 변호하는 아주 훌륭한 인물로 그리도록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가 다 ‘보이지 않는 손’ 아니 ‘보이지 않는 공정한 머리’와 ‘보이지 않는 따뜻한 가슴’이 필요하지 않은가.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각자는 다 이중인격자라 할 수 있으리라. 애티커스의 빛과 그림자 양면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단지 ‘앵무새’를 죽이고 살리느냐가 우리 개개인 각자에 달렸다.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어느 국가, 여느 사회에서든 마찬가지겠지만 세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미국만 보더라도 밝은 면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면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데는 흑인 대통령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보수 백인 사회의 뿌리 깊은 반감이 절대적으로 작용했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었나. 오바마가 흑인 대통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선까지 되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흑백격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공공연히 실시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넬슨 만델라(1918-2013) 대통령이 등장하지 않았었나. 그리고 전태일(1948-1970)이 분신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한국에서도 비록 결국 투신자살로 끝나고 말았지만 가방끈도 짧은 인권변호사 노무현(1946-2009)이 서민대통령이 되지 않았었나.
언제 어디서나 밝은 면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면도 있게 마련이다. 비교적 객관적인 것 같은 다큐멘터리도 어느 면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나지 않든가. 그러니 사람은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고 찾는 것만 눈에 띄게 되는 것이리라. 어느 쪽을 죽이느냐에 따라 그 반대쪽이 살아난다면 세상의 명암도 각자의 명암도 결정되는 것이리라. 실로 빛을 위해 어둠도 존재하는 것이리. 그렇다면 인위적인 인공지능이든 그 어떤 아무런 고정관념도 선입견도 편견도 없던 자연적인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곧 명선이복초(明善以復初)가 우리 삶 속에 선을 밝히는 길이리라.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의 길’임에 틀림없어라.
2015년 개봉된 디즈니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장면이다. ‘생각열차’를 타고 가다 영화 속 인물 조이가 두 개의 상자를 넘어뜨린다. 하나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의견’이란 딱지 꼬리표가 붙어 있는 상자들이다. 이 두 상자에서 쏟아진 것들이 마구 섞이는데 이를 원상복구 하기는 난감한 일이다. 쏟아진 ‘사실들’과 ‘의견들’이 서로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늘 경험하는 일 아닌가. 특히 선입견이나 편견 또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일수록 이 두 가지를 혼동하게 되는 것 같다.
이것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사실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의견이 개입되는 현상이리라. 비근한 예로 누가 어떤 질문을 해 올 때 때때로 우리는 동문서답하게 되지 않든가. 어떤 사고나 범죄가 발생했을 때 그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이 후에 증인으로 소환되어 증언하는 것을 들어보면 제각각이다. 그러니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절대적으로 객관적일 수 없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고운 사람 미운 데 없고 미운 사람 고운 데 없다는 의미로 애인무가증(愛人無可憎)이요, 증인무가애(憎人無可愛)라 하지 않나. 그뿐더러 똑같은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희망을 품을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빠져 삶을 포기하기도 하지 않든가.
서간체소설 ‘자줏빛(1982)’으로 미국의 내셔널 북 어워드와 퓰리쳐상을 수상한 미국의 인기 흑인 작가 알리스 워커(1944 - )의 1992년 출간된 ‘남모르는 기쁨을 갖기’ 서두 책 첫머리에 ‘허물없는 00에게’란 저자의 헌사가 있다. 이 소설은 여자혐오증 특히 어린 소녀의 외음부 성기를 잘라내는 관습을 다룬 작품으로 저자는 그 에필로그에서 오늘날도 아프리카와 아시아 및 중동지역에 사는 1억 이상의 여성들이 이와 같은 만행의 제물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어디 미개사회에서뿐이랴. 미국에서 일 년에 자궁절제수술을 받는 여성이 60만 명이 넘는데 이 가운데 반 이상이 불필요한 수술을 받는 것이라고 미국의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주장한다. ‘여성과 의사들(1992)’의 저자 존 엠 스미스 박사는 이러한 불필요하고 정당화될 수 없는 수술행위로 지불되는 의사료만 일 년에 10억 달러 이상이라며 의사들이 과다한 보수를 챙기는 반면 불충분한 감독 제재를 받고 있다는 현실에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제왕절개수술 대신 그 대안으로 다른 치료법을 개발하고 사용하는데 의사들이 무관심하고 무성의하다”면서 그는 의사들이 여성 환자들을 비인간적으로 잘못 다루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단다.
한번은 그의 한 동료 의사가 자기가 진찰한 한 여성의 몸을 ‘상담 고문의사’로 가장하고 구경하라고 하더란다. ‘여자가 기막히게 섹시한 몸과 음부를 가졌다면서 말이다. 어쩌면 이런 남성 공통의 약점을 간파해서인지 (실토하자면 나 자신을 포함해 많은 소년들이 사춘기 때 장차 커서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마음대로 여자의 ‘음부’를 실컷 봤으면 했던 기억이 있지 않나) “남자가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선 안 된다”고 스미스 박사는 선언하듯 말한다.
여자의 몸을 진찰하는 역할은 응당 당연히 여자에게 속한 것이다. 여성만이 여성을 이해하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데 현재 산부인과 전문의의 80%가 남성이란다. 그뿐더러 많은 남성들이 부인과를 전문분야로 선택하는 것이 여성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우월한 입장과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려는 그들의 잠재의식적인 필요성에서란다.
부인과 전문의는 무엇보다도 예방과 응급, 조기 진료에 치중해야 한다면서 여성의 신체적인 구조와 배란, 임신, 월경 등 생리적인 작용과 현상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여성의 성욕, 성적 상호작용, 문화적인 가치관, 불안감과 공포심 등 여성 특유의 심리적 구조와 생리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는 까닭에 남자는 부적격하고 여자가 적임자라고 스미스 박사는 설명한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우리말에 예부터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했다.
그러니 여성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흠모 흠앙의 대상일 뿐, 그 신비경과 신성불가침성을 침범하거나 모욕 모독해서는 절대로 아니 됨을 세상의 모든 남성들이여, 명심할지어다. 옛날 그리스의 시인 미네르무스(630-600 BC)가 탄성을 지르며 탄식했듯이 말이어라.
사랑과 아름다움이 없는 곳에
무슨 삶이 있으며
무슨 기쁨이 있으랴!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없는 곳에)
아,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하나같이 비록 한 방울의 핏방울이든 땀방울이든 눈물방울이든 흘러 흘러 우리의 영원한 고향 코스모스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리. 아롱아롱 아지랑이처럼 하늘하늘 코스모스하늘로 피어오르는 것이리.
얼마 전부터 미국의 청소녀, 청소년들의 유행어가 ‘제기랄 난 아무것도 (할) 수조차, (알) 수조차, (상상할) 수조차 없네’란 뜻으로 (I can’t even. I’m unable to even. I have lost my ability to even. I am so unable to even. Oh, my God. Oh, my God!)’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이젠 총체적으로 파산에 직면한 온 인류의 비명에 가까운 넋두리가 될 줄이야!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빌 게이츠(1955 - )의 “코로나 코비드19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란 메시지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 14개 항목으로 된 글에서 그는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그렇듯이 바이러스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
사람들 사이에 국경이나 경계도 있을 수 없고 우린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
우리가 망각한 것은 건강한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서로 도와 삶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
인류사회가 물질문명에 중독되어 기본적인 물과 식료품 약품을 등한시해왔다는 것.
끊어지고 멀어졌던 가족 간의 긴밀한 유대를 회복하는 것.
우리의 진짜 직업은 서로를 돌보고 보살펴 서로를 이롭게 하는 것.
인류가 아무리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더라도 바이러스가 지구를 정지시킬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게는 상생의 길 아니면 자멸의 길,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
인류역사상 위기 중 하나인 코로나바이러스에 인내심을 갖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
이 위기가 종말이 될 것인지 새로운 시원이 될 것인지는 우리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사는 이 지구별 자체가 병들었기 때문에 우리 또한 중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
해법 없는 문제란 없는 법. 그러니 패닉하지 말고 계절이 바뀌듯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
이 코로나바이러스를 큰 재앙으로 보지만 나는 이를 하나의 좋은 교훈으로 여긴다는 것.
이상과 같은 여러 마디를 단 한마디로 내가 줄이자면 ‘우린 너 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라는 것이고, 이를 또 한두 마디로 부연하자면 우리 동양의 선인들이 일찍부터 명명백백히 단순명료하게 밝힌 ‘피아일체’와 ‘물아일체’라고 할 수 있다. 어떻든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이 절망감은 전적으로 자신감이 결여된 회의와 냉소와 혼란과 당혹감의 발로인 것 같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표류하면서 너무 쉽사리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오늘날의 젊은이 아니 어린이들이 부모의 과잉보호로 심약한 악골들이 되어 쉽게 겁먹고 쉽게 상처 입고 쉽게 무기력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몇 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잔혹 동시’ 논란에서 표출되었듯이 정신적인 폭력으로 발산하게 되는가 보다. 또는 또 몇 년 전 ‘천재 소녀 명문대학 허위 입학소동’에서처럼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욕심을 견디다 못해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에 동시 입학했다고 자기최면이라도 걸게 되는 게 아닐까. 어차피 모든 것이 미지수인 마당에 매사가 하기 나름이고, 삶 자체도 살기 나름 아니던가. 심고 가꿔야 거두게 되고, 하늘을 봐야 별을 따게 된다고, 숨을 내쉬어야 또 들이마실 수 있다.
그러니 세상에 공짜란 있을 수 없지. 이 사실 아니 진실을 깨우치는 순간부터 삶다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리라. 이 점을 주지시키는 것이 교육의 전부라고 해야 하리라. 그렇지 않고 학교 교육이라는 것이 단지 학위나 졸업장으로 취직을 위한 스펙 쌓기나 수지타산, 계산계정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야말로 인간로봇을 생산하는 공장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삶을 살아본다는 것은 아무 누구와 경쟁하는 것도, 남에게 내가 얼마나 성공하고 잘 사는지를 자랑하는 것도,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가도 아니고, 내가 얼마만큼 삶을 살아보는가가 아닐까. 다시 말해 삶을 얼마만큼 사랑해 보는가이리. 숨 쉬는 것부터, 눈 뜨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온갖 경이로운 소리를 들어 보는 것,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는 것, 섹스를 즐겨 보는 것, 연애를 하고 실연도 당해보는 것, 결혼도 하고 또 하게 되면 이혼도 해보는 것, 이런 일도 저런 일도 다 해보는 것, 어떤 일을 도모했다가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보는 것, 내 자식 남의 자식 가리지 않고 키워본다는 것, 젊어 보기도 하고 늙어보기도 한다는 것, 눈을 감고 잠을 자면서도 꿈까지 꾸어본다는 것, 그리고 살다가 죽어본다는 것, 이 모두가 다 얼마나 기적 같은 일들이고 더할 수 없는 축복인가. 이 외에 우리가 뭘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체코 태생으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해온 작가 밀란 쿤데라(1929 - )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유머 센스가 있는 사람은 믿을 만하다”고, 그의 2013년 작 중편소설 제목도 반어법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무의미한 축제이다. 축제란 영원하지 않고 잠시 지속될 뿐이라면 다양한 놀이를 우리 각자 성향대로 식성대로 취향대로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만큼 해보기다.
백인백색이라고 음식도 다 한 가지 맛일 수 없고, 무지개도 단 한 가지 빛깔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우리 각자가 좋아하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맛보는 만큼, 꿈꾸는 만큼, 살아보는 것이 각자의 삶이 되리라. 축제의 존재 이유가 즐기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르헨티나의 시인 안토니오 포르키아(1885-1968)가 했다는 말을 우리 각자 심사숙고해 보리라.
“내가 네게 뭘 주었는지 알지만, 네가 무얼 받았는지 난 모르겠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