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5년 20년 이상 허가가 나기를 기다려 2천만 불 이상의 자금을 동원, 뉴욕의 센트럴파크에 2주간 ‘문’이 설치됐었다. 7천5백3십2개 ‘문’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설치 미술작가 ‘크리스토와 진 클로드’의 대답은 이러했다.
“세상의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당신이 생각한 대로 이것이 어디 이 ‘문門’뿐이겠는가. 세상만사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의미는 각자 자신이 부여하는 것이란 뜻이리라. 마치 페르시아의 동화에서처럼 ‘아브 라카다브라’라고 외우면 문이 열린다는 주문 말이다. 우리말에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듯이 현대 서양의학에서도 ‘플라시보 효과’라고 약 성분이 전무한데도 환자가 약품이라고 믿으면 그 어떤 약 못지않게 약효가 있다고 하지 않나.
이것은 곧 믿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신앙을 통해 어떤 신神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로 신앙을 잃음으로써 좀 더 참다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리라. 이럴 때 신앙이란 마음 문을 닫느냐 여느냐에 따라 독선독단의 아전인수식 편파적으로 편애하는 말하자면 인격보다도 못한 신격의 신답지 않은 신을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2021년 4월 15일 출간된 ‘한국적인 것은 없다: 국뽕 시대를 넘어서’ 에서 한국의 정체성에 관해 오랫동안 천착해 온 철학자 탁석산은 우리 문화에 대한 국수주의적 뿌리 논쟁을 그치고 이 시대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무기로서의 문화를 적극 수입 발굴해야 한다는 것. 그는 시대를 초월해 고정불변하게 이어져 온 한국적인 것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인의 가치관이나 미의식 등은 사회 변화에 따라 바뀌어 왔거나, 시대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오히려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찾으려는 강박이 우리 문화를 정체시키고, 썩게 만든다는 주장으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진정한 한국문화는 뿌리보다 수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한국에서는 ‘없다’ 시리즈가 유행했었다. ‘예수는 없다,’ ‘붓다는 없다’를 비롯해서 ‘한국은 없다,’ ‘한국사는 없다’가 있었는가 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깨달음은 없다’라는 책까지 나왔었다. 어떤 목사님이 쓰신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역설적으로 ‘예수는 없다’가 되었다. 이쯤에서 스님이 ‘절이 죽어야 부처가 산다’는 책을 쓸 법도 했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 온 인류가 백인종이다 흑인종이다 황인종이다 하는 인종 간의 차별은 물론 만물의 영장이라 자칭 자만자족해온 인류의 인종주의를 어서 졸업하고 우주만물이 다 하나 같이 코스미안임을 크게 각성할 대오일번의 기회가 왔어라. 하버드대 펠레그리노 석좌교수이며 미국 학술원 회원으로 20여 권의 과학 명저를 저술해 미국 국가과학메달과 국제생물학상을 수상한 에드워드 윌슨(1929-2021)의 저서들은 한마디로 ‘생태계 없이는 인간도 없다’로 요약될 수 있다.
인도의 과학, 기술, 생태계연구재단의 대표로서 개발과 세계화란 명목으로 자연을 약탈하고 있는 서구 문명을 비판해 제3세계의 노벨상인 ‘올바른 삶을 기리는 상’ 수상자인 반다나 시바(1952 - )의 저서들은 ‘자연=여성, 과학=남성’으로 해석, 이성과 합리성 맹신이 생태 재난의 주범이라며 직관과 포용의 여성성 회복을 주장한다. 과학은 어머니인 대지를 죽였으며 ‘과학(남성)이 죽어야 자연(여성)이 산다’는 것이다. ‘자연 없이 인류문명도 없다’는 결론이다. 이른바 ‘사랑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세계의 모든 종교인들이 교리를 초월해서 사랑으로 대동단결하기는커녕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파쟁만 일삼아왔으니 이교도와 이방인 정벌에 나선 십자군이 또한 분열하여 혼란을 일으킨 나머지 진정한 사랑의 개념을 타락시키고 말았다.
“종 차별주의, 곧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인종 차별주의 이며, 시대착오적인 사상이다. 잡아먹거나 실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동물을 사육하는 것은 노예제도만큼이나 나쁜 짓이다.”
25년 전(1999년) 프린스턴대학에서 생물 윤리학 강좌를 맡도록 선임되어 물의를 빚었던 피터 싱어(1946 - ) 교수가 ‘동물 해방(1975)’이란 그의 저서에서 주장하는 말이다. 이제 서력기원 21세기를 맞은 지도 벌써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자연환경은 물론 정치 사회 경제 환경이 점차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동트기 직전이 가장 깜깜절벽이 아니던가. 결코 비관하고 절망만 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시지탄을 금할 길 없으나 근년에 와서 소위 선진문명사회의 동향이 180도로 급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서양사람들이 동양으로 눈을 돌려 우리 동양 고유의 오래된 노장철학과 원효의 화쟁사상 그리고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 등에서 인류의 구원과 진로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사회는 월등한 물질문명의 힘으로 전 세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지구생태계를 파괴, 인류의 자멸을 재촉해 왔다. 이제 더 이상 기존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즉 정복의 대상으로서의 자연관, 착취대상으로서의 대인관, 아전인수식의 선악관이나 흑백이론의 이분법으로는 그 해답이 없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종교, 사상, 철학, 과학, 의학, 문학, 예술 각 분야에서 서양의 선각자와 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마치 종전의 주기도문 외우듯 물아일체, 피아일체를 읊조리는 것을 종종 듣고 보노라면 우리는 절로 회심의 미소 완이일소하게 된다.
얼마 전 서양의 세계적인 과학자와 천문학자들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평생을 두고 과학과 천문학에 전념해온 결과로 얻게 된 결론이 동물, 식물, 광물 가릴 것 없이 ‘생명은 하나’라는 것과 또 하나는 본질적으로 별의 원소와 인간의 원소가 같은 물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만고의 진리를 우리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지 않았나.
여름밤 시골 마당에 돗자리 깔고 누워 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 들을 보면서 ‘별 하나 나 하나’라고 노래하지 않았나.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믿어왔듯이 우리가 죽으면 다시 별이 되어 우리 고향 코스모스 우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리라. 이미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는 더이상 로봇이나 노예처럼 재미없고 흥미롭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고 신나게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어떤 삶이 창조적인 삶일까. 말할 것도 없이 각자가 각자의 가슴 뛰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각자의 그리움을 그리고 쓰는 그림과 글, 곧 각자의 혼불을 지피는 노래와 춤을 미치도록 죽도록 부르고 추어보는 일이리라.
몇 년 전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환경과 삶’ 칼럼 ‘내 마음의 명왕성’이란 글에서 수필가 환경 엔지니어 김희봉 씨는 이렇게 우주의 섭리를 이해한다.
“태양계의 끝, 햇빛은 스러지고 별들만 숨 쉬는 곳, 불 꺼진 변방의 간이역처럼 홀로 떠 있는 우주의 섬, 그 외로운 명왕성에서 기척이 왔다. 지난주 미국의 우주 탐사선 뉴호라이즌스호가 근 10년을 날아 근접한 명왕성에서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2006년 태양을 등지고 날아간 무인선이 보내온 첫 영상엔 놀랍게도 커다란 하트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달 표면의 계수나무처럼 명왕성엔 하트가 선명했다. 명왕성이 보낸 연서(戀書)였다. 알다시피 우주의 가장 큰 법칙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우주의 별들이 수없이 명멸하고 원자의 수가 증감해도 총량 에너지양은 변하지 않는다. 또 있다. 빛의 속도나 만유인력 상수(常數), 전자의 전하 등도 변하지 않는다. 우주의 법칙은 작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변하나 큰 눈으로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조물주의 섭리도 그럴 것이다. 그 섭리를 이해하고 탐험선의 운행에 운용하는 것이 과학이요. 그 섭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옳거니, 그렇고 말고, 여부가 있으랴! 우주처럼 시작도 끝도 한도 모를 무궁무진한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으로 숨 쉬다 사랑으로 돌아갈 삶에서 이 사랑이란 경이로움의 극치에 우리는 무궁무진 감사할 일뿐이어라. 이 사랑의 불꽃을 고두현 시인은 ‘만리포 가다가’ 발견한다.
만리포 사랑
당신 너무 보고 싶어
만리포 가다가
서해대교 위
홍시 속살 같은
저 노을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바알갛게 젖 물리고
옷 벗는 것
보았습니다.
장석주 시인은 이 사랑의 불꽃 때문에 ‘세상은 살 만한 것이다’라고 한다.
“사는 게 진절머리 난다면 천리포 만리포 가다가 서해대교 위에 멈춰 서서 홍시 속살 같은 타는 노을을 보라! 저 노을이 만물에게 바알갛게 젖 물리는 모습을 보라. 자연은 젖을 물려 만물을 길러낸다. 해는 아침에 뜨고 저녁엔 서쪽으로 지는데, 이 해의 은총 속에서 식물들은 꽃을 피우고 사람은 사랑을 하며 아기들을 낳고 산다. 괴테는 태양 속에 존재하는 신(神)의 빛과 생산 능력을 숭배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이들이 있고, 도라지밭에서는 도라지꽃이 피고 감자밭에서는 감자알들이 커간다. 세상은 살만한 것이다.”
2015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 두 권이 오늘의 우리 시대상을 잘 관찰하고 진단한다. 그 하나는 ‘과소평가되고 있는 인간: 놀라운 기계들이 결코 알지 못할 것을 아는 우등생 인간들’로 저자 조프리 콜빈(1953 - )은 현재 컴퓨터가 인간이 해오던 일들을 인간보다 더 신속 정확하게 훨씬 더 능률적으로 수행하게 되어 인간을 도태시키고 있지만 절망할 일이 아니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성 아닌 감성으로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는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란다. 기술적인 면은 기계에 맡기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치중하면 된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자신과 영혼: 이상옹호론’인데 저자 마크 애드믄슨은 이렇게 관찰하고 진단한다.
“서구 문화는 점진적으로 더욱 실용적이고 물질적이며 회의적으로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성인 성자들은 의미 있는 자비심 충만한 삶을 추구한다. 재화를 획득하고 부를 축적하노라면 인간의 참된 도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성스러운 삶이란 욕망 이상의 인류를 위한 희망이다. 이것이 일찍부터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만족감이다.”
이 두 권의 책 내용을 내가 한 마디로 줄여보자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건 ‘사랑’이란 말이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게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나 자신을 사랑할 때 내가 진정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영어의 사자성어 ‘love’는 우리말의 이자성어 ‘사람’과 ‘사랑’이라는 동음동의어가 돼야 하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