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서 칼럼] ‘혼자 늙어가는 시대’의 돌봄노동

금상 수상

 

 

[수상소감] 

 

오랫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칩거의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졌지만 담장 너머의 세상이 궁금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달라진' 세상에 나를 구겨 넣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만의 세상에서 '충분히' 잘 살아내었다.

 

나를 다시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한 건 고석규비평문학관이었다. 이제, 비평가 고석규, 김윤식, 남송우는 김현 이래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비평가가 되었다. 문학관 관장이 되고 난 이후 종종 비평적 감식안을 자랑하는 전문적인 비평가들 사이에서 '초라한'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쓰곤 했다. 억울함, 비겁함, 후회, 원망, 소망 등의 단어들이 뒤섞여 출렁이는 내 글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여겨질 즈음, 덜컥 이 상을 받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지만 다시 부끄러워졌다.

 

순진하게도, 나는 여전히 권선징악을 믿는다. 세상의 악당들을 벌주는 상상도 자주 한다. 선과 악이 팽팽하게 맞서는 세상, 그것이 내가 꿈꾸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이 더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세상은 이미 온통 악의 물결로 넘쳐난다.

 

이 상을 계기로 나는 하찮은 나의 선량함과, 알량한 나의 글쓰기로 폭주하는 세상의 악과 한번 맞붙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글이 곧 사람이 되는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나 그럴수록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나에게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제6회 코스미안상 금상  ‘혼자 늙어가는 시대의 돌봄노동'

 

중년이 되어서도 가정을 이루지 않은, ’홀로 늙어가는‘ 에이징 솔로’가 거침없는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혼자 사는 일이 과도기적인 일이지도 예외적인 삶의 양식도 아니다. 가족주의가 강력한 한국사회에서 3가구 중 1가구가 혼자 사는, 이른바 ‘혼삶’이다. 과거 ‘정상가족’이라고 불리던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구는 전체 가구의 29.3%에 지나지 않는다. 1인 가구의 비중이 2021년 기준으로 33.4%였다고 하니 이미 오래전에 ‘정상가족’을 추월했다. 

 

과거 1인 가구 담론이 주로 청년이나 돌봄이 필요한 독거노인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기러기 아빠로 대변되는 위기의 중년 남성과, 특히 비혼여성들의 삶이 담론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비혼여성의 경우, 이들은 대개 가족이 없는 극단적인 이미지로 재현되면서 무언가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초고령사회인 한국에서 ‘애초부터’ 솔로의 조건으로 노년이 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 났다는 것은 생애주기에 따라 구조화된 한국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혼자 산다는 의미는 무엇을 기준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오랫동안 혼자인 삶을 꾸려온 덕분에 결혼에 대한 주위의 압력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생애 과제인 경제적 독립, 주거문제, 친밀한 관계 맺기, 정서적 안정, 노년의 준비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결혼해서 ‘정상가족’을 이룬 이들보다 생애 과제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비정상적이고 비참한 노년을 맞게 될 것이라는 오해도 만연하다. 이는 혼삶이라는 삶의 방식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말년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과제는 처음부터 결혼을 통한 ‘정상가족’ 꾸리기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

 

인류가 만든 가장 오래된 제도의 하나인 결혼이 이제는 가장 낡은 사회적 산물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생긴 듯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결혼만이 가족구성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혈연가족의 속박이나 부당한 처사에서 벗어나 가족이 아니어도 가족처럼 살고자 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이런 현실과 무관하게, 혹은 역행하여 우리사회의 ‘돌봄’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팬데믹 위기 이후 우리사회의 돌봄 위기는 급속하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3년간의 코비드 유행으로 인해 학교와 유치원을 포함한 교육시설과 일체의 사회적 돌봄 시설들이 폐쇄되면서 그동안 주변화되고 비가시화되어있던 돌봄노동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것이다.  

 

3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인해 왼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셨다. 평생을 경미한 장애를 안고 사셨지만 일상적인 생활을 남에게 의지할 정도는 아니셨다. 그러나 수차례의 수술과 연이은 교통사고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5년 전부터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셨다. 그때부터 아버지만큼이나 ‘허약한’ 엄마와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는 고스란히 나의 짐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아버지가 공직에 계셨던 덕분에 적지 않은 액수의 연금을 타신 것과, 내가 비정규직 프리랜서라 시간이 자유롭다는 사실이었다. 

 

얼마간은 내 일을 하면서도 부모님을 돌볼 수 있는 처지가 내겐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문제는 코로나가 전방위적으로 기승을 부리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체적으로 이미 충분히 쇄약해져 있었던 아버지는 격리에도 불구하고 곧 코로나에 감염되셨다. 이때부터 아버지가 폐렴 합병증으로 돌아가시기까지, 불과 8일간이었지만 나에겐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 ‘지옥의 묵시록’ 그 자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나는 공황장애에 시달렸다.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마저 어려운 시기에 나의 머릿속은 온통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친 숨소리, 가느다란 팔, 철심이 박힌 채 기어다녔을 닳은 무릎과 등의 욕창까지, 나는 그 후로도 꽤 여러 날을 아버지의 ‘취약한’ 몸의 잔상에 갇혀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의 노골적인 현실과 그들의 일상을 잘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든 계기가 되긴 했지만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배제된 이들의 ‘예외적인 몸’들이 겪는 일상의 취약함에 대한 나의 감수성은 부끄러운 수준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전과 달리 돌봄이 필요한 ‘의존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독립적’인 사람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한 우리사회의 돌봄 논의에 분노한다. 나는 아버지를 잃고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겪은 고통과 ‘온전하지 않은 이들의 몸의 물질성’에 대해 눈을 떴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는 이제 혼자 지내는 삶이 훨씬 익숙하다. 그러나 가끔 여전히 혼자일 말년의 삶을 상상하면서 모종의 불안과 두려움을 마주한다. 더 이상 자력으로 내 몸을 통제할 수 없다면? 만약 나에게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감옥 같은 요양원으로 옮겨져 요양이나 보호와는 거리가 먼, 학대에 가까운 보호를 받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려 동일한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복기해 본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곧 분명해진다. 우선 ‘아프고 늙고 의존하는 몸으로 사는 것’이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내야 할 일임을 상기한다. 미리 앞당겨 온 불안감에 떨고, 타인의 경험에서 투사된 두려움으로 휘청거리기 보단, 우리사회의 돌봄 관행을 살피고 그것이 초래하는 문제적 구조를 바꿔내는 일에 좀 더 전력해야지 하는 다짐도 한다. 나는 이제 “공적 제도로서 돌봄이 보장되고, 제도가 다 수행할 수 없는 돌봄이 가족 내에서 성별과 관계없이 민주적으로 분배되고, 돌봄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게 평가되며, 돌보는 사람도 쉼과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단독자로 왔다가 단독자로 떠난다. 이는 세상에 머무는 동안 변하지않는 사실이다. 누구도 외로움, 돌봄, 생계, 노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저마다의 ‘정답’이 그들의 삶이 된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우리사회의 ‘평범과 보통’에 대한 압력에 굴복한다. 주류에서 벗어난 삶이라고, 사회적 소수자의 삶이라고 손가락질 받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만큼의 무게감으로 ‘당연시’되던 것들이 질문이 되고, 알지 못했던 고통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회적 현실을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공동의 논의로 이끌어 내는 데엔 생각보다 많은 자원이 필요치 않다. 한국사회에선 누구나 한 번쯤은 심각한 돌봄위기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초고령사회의 명암도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제 예전만큼 ‘국가의 책임’이나 ‘정책의 변화’에만 목을 매는 이들이 많지 않은 듯하다. 그만큼 성숙한 시민들이 우리사회의 근간을 지키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 스스로 인간이 가지는 취약성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더 이상 아프거나 늙거나 하는 이유로 내 삶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돌보거나 돌봄을 받거나, 나는 이제 어떤 돌봄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모든 관계가 헌신과 인내로만 이루어질 순 없지만 그동안 우리사회가 퉁쳐왔던 감정노동, 이를테면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부모를 향한 효심 따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상호존중의 계기로 삼는다. 취약한 몸과 몸을 이어주는 많은 이야기들에도 또한 귀를 기울인다. 

 

신뢰에 기반한 돌봄의 구조화, 아마도 이것은 우리 시대 관계성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줄 것이다. 돌봄노동을 통해 그것이 내재하고 있는 변화의 잠재력으로 다른 질서도 상상해 보자. 우리는 할 수 있다. 

 

작성 2024.10.18 10:31 수정 2024.10.1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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