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상소감]
생각지도 않은 당선 소식에 무척 반갑고 기쁘기도 하지만 발걸음이 조심스럽고 두렵기도합니다. 이런 영광된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해주신 코스미안뉴스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제6회 코스미안상 은상]쓰죽회를 아시나요
'수의(壽衣)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쓰죽회'는 이 옛말에 새로운 의미를 더한다. '노후를 대비해 모아둔 돈을 의미 있게 쓰고 죽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100세 시대를 맞아 노후 준비와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 개념이 시니어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다.
요즘 돈이나 재산싸움으로 가정이 파탄나고 불행한 일이 벌어지는 사례를 매스컴이 아닌 주변에서도 자주 접한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옆에 강남에서도 이름난 3층짜리 아담한 한정식 집이 있었다. 그 집이 헐리고 지금은 사각형의 볼품없는 원룸 건물이 들어섰다. 재산 싸움으로 건물주가 바뀌면서 용도를 변경하여 10층짜리 건물로 신축했다.
한정식 건물주의 아들과는 체육관에서 자주 마주치며 가깝게 지냈다. 50대 초반의 그는 90세가 넘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체육관에 나오지 않아 알아보니 집안에 상을 당했다고 했다. 당연히 어머니의 상이라 생각하고 문상을 갔는데 놀랍게도 영정 사진 속 얼굴은 그 아들이었다.
모친은 유산으로 건물 세 채를 가지고 있었다. 노모를 20년 넘게 모셨는데 노환에다 병수발까지 해야 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와이프와 나름 고생을 하고 있으니 살고 있는 한 채쯤은 자기 앞으로 옮겨놓아도 자기보다 형편이 나은 자매들이 이해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사전 동의 없이 은밀하게 소유권 이전 작업을 하다 누이들한테 누설되고 말았다. 급기야 재산싸움으로 번지고 소송에 휘말리면서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다 죽음에까지 이르렀다.
이같은 사례는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알뜰살뜰 모은 재산을 자식에게 남겨주고 떠나겠다는 생각은 한국의 부모라면 인지상정이자 전통문화였다. 자식이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기반을 닦아주고 싶은 바람은 모든 부모의 소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은퇴는 급속히 빨라지고 있다. 대가족으로 함께 살며 자녀 봉양을 받던 시절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쓰죽회에 대해서는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내가 번 돈이니 내가 다 쓰고 죽겠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액티브 시니어들의 한 현상이요 ‘인생은 한 번뿐’의 욜로(YOLO) 정신이 젊은이들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미국 최고의 재무 설계사 스테판 M. 폴란의 ⟪다 쓰고 죽어라⟫는 책이 나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 그 실천자들이 국내에도 생겨나기 시작한 셈이다. 그는 ‘최고의 자산 운영이란 자기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서 트로피처럼 모셔두지 않고 행복을 위하는 일에 쓸 줄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사람들은 쓰죽회가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몇 년 전 서강대 모 교수가 서울대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부모가 언제쯤 죽으면 가장 적절할 것 같은가?’라는 설문조사에서는 '63세'라고 답한 학생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은퇴한 후 퇴직금을 남겨놓고 사망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이라니 가슴이 먹먹하다.
돈은 우리의 욕망을 끝없이 키운다.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원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해보고 죽자는 쓰죽회가 많이 생겨나고 있다. 쓰죽회가 자신만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아끼지 말고 다 쓰고 죽자’는 취지로만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삶을 통해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방향으로 돈을 쓴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최근 죽음을 당하기보다 죽음을 맞이하자는 '웰다잉(Well-Dying)'이라는 개념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쓰죽회의 정신에 공감한다. 유산에 대한 집착이 평생의 삶을 힘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손을 위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현재 진정으로 필요한 곳에 돈을 쓰고 베푸는 것이 더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낼 수 있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는 ‘부자로 사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돈에도 품격이 있다. '진지하게 버는 것'과 '의미 있게 쓰는 것'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제 공자가 말한 종심(從心)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내 삶의 방식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들은 가능한 한 정리하고, 새로운 도전을 찾아 낯선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내가 새롭게 추구하는 삼미(三味)란 흥미, 재미, 그리고 의미(意味)다.
흥미는 나이와 상관없이 새로운 일이나 세상의 변화에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재미는 기왕 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의미는 나 자신을 위한 일뿐만 아니라 남을 돕는 봉사를 통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노년의 사치'다.
다행히 나는 몇 년 전부터 여러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기부하는 일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내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돈에 대해 가장 확실한 것이 있다면, '죽을 때 쓰고 난 영수증만이 내 돈이고 나머지는 남의 돈'이라는 사실이다. 쓰죽회는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우리 사회가 함께 발전시켜 나가야 할 새로운 삶의 철학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