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육전에서 일본군에게 연이은 패배를 겪은 조선 조정은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1593년 1월 초 명군의 지원으로 조선은 평양성을 탈환하였지만, 같은 달 27일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명군은 1593년 4월 교섭을 통해 일본군을 도성에서 철수시킨 뒤 강화교섭을 중요한 전략으로 활용하려 하였다. 조선 조정은 강화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명군의 지원 없이는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군비 전략과 강화에 관한 외교 전략을 병행하게 되었다.
조선과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은 1596년까지 계속되었다. 1596년 8일 명나라 사신 정사(正使) 양방형(楊方亨)과 부사(副使) 심유경(沈惟敬)이 강화협상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자, 조선에서는 그들을 수행할 목적으로 황신(黃愼)과 박홍장(朴弘長)이 따라갔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당시의 강화협상에 관한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6년 7월 10일
늦게 체찰사(이원익)의 전령에 “황 첨지(황신)가 이제 명나라 사신을 수행하는 사신이 되고 권황이 부사가 되어 가까운 시일에 바다를 건널 것이므로 (그들이) 탈 배 3척을 정비하여 부산으로 정박시키라.”라고 하였다.
[원문] 晩 体察傳令內 黃僉知今爲天使跟隨上使 權滉爲副使 近日渡海所騎船三隻 整齊回泊于釜山云.
위 『난중일기』의 기록에는 조선의 사신이 황신과 권황(權滉)이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나중에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에 권황은 박홍장(朴弘長)으로 교체되었다. 『선조실록』의 기사(『선조실록』 권76, 선조29년-1596년 6월22일 무오 3번째 기사; 『선조실록』 권76, 선조29년-1596년 6월25일 신유 3번째/5번째 기사 등)에 따르면 조선 조정은 일본과의 강화회담 시에 발생할 수 있는 만일의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는 우리나라 사신들에게 통신사(通信使)라는 호칭 대신 근수배신(跟隨陪臣)으로 칭하도록 조처하였다. 위 『난중일기』 원문에서 황신을 '跟隨上使'로 칭한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황신의 자는 사숙(思叔), 본관은 창원(昌原), 생몰년은 1562년~1617년이다. 그는 강화협상을 위해 일본에 다녀온 기간 동안 『일본왕환일기(日本徃還日記)』라는 기록을 써서 당시 일본에 갔던 사신들의 행적을 상세히 남겼다. 위 『난중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체찰사 이원익은 통제사 이순신에게 사신 일행의 교통을 위해 배 3척을 정비하도록 요청하였는데, 『일본왕환일기』에도 이와 관련이 있는 기록이 있다. 『일본왕환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경상좌수영에서 배 1척을 보내고 경상우수영에서 배 3척을 보냈는데, 사신 일행은 일본의 배를 탔고 우리나라 배에는 물품들을 실었다. 다음은 『일본왕환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일본왕환일기』, 1596년 8월 4일
이번 사행에 경상좌수영에서 배 1척, 경상우수영에서 배 3척과 아울러 여러 가지 물건을 갖추어 보내왔다. 통신사는 처음에 우리나라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고 하였는데, 왜인들이 조선의 배 제도는 밑이 너무 넓어 큰 바다에는 편리하지 못하고, 왜선을 타야 만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굳이 청하였다. 드디어 왜선을 타고, 복물(卜物)은 우리나라 배에 나누어 실었다.
『난중일기』에는 강화협상 사신에 관한 내용이 두 차례 더 언급되어 있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6년 7월 11일
늦게 경상수사(경상우수사 권준)이 와서 바다를 건너갈 격군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근수배신이 바다를 건널 때 (사용할) 양식 23섬을 다시 방아를 찧은 것이 21섬이 되어 2섬 1말이 줄었다.
[원문] 晩 慶水使來議渡海格軍. 跟隨渡海粮 二十三石改舂二十一石 則二石一斗縮.
* 격군: 배에서 노를 젓는 인력을 말한다.
『난중일기』, 1596년 7월 21일
통신사가 요청한 표피를 가지고 오도록 본영으로 배를 보냈다.
[원문] 以通信使請豹皮持來 送船本營
* 표피: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많은 표범이 서식하였으며, 이는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시대 문헌에서 쉽게 확인된다. 표피는 진상 물목에 속하였으며, 외국의 사신이나 주요 인사들에게 선물로 증정되기도 하였다.
『난중일기』의 1596년 7월 11일 기록에 따르면 통제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권준은 근수배신의 배에서 노를 저을 격군의 배치에 대해서 의논하였고, 근수배신이 사용할 양식도 마련하였다. 『일본왕환일기』의 제일 앞부분에는 근수배신 일행의 명단이 적혀 있는데, 이 가운데에는 격군이 150명이라는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난중일기』의 1596년 7월 21일 기록은 근수배신을 통신사로 칭하였는데, 일본에 가는 사신을 통신사로 부르는 것이 통례라서 이렇게 적은 것 같다. 재미있는 점은 위에서 살펴본 『일본왕환일기』의 1596년 8월 4일 기록조차 사신일행을 '근수배신'이 아닌 '통신사'로 적었다는 사실이다. 『난중일기』의 이날 기록은 또한 통신사가 사용할 표피를 언급하였는데, 『일본왕환일기』의 9월 3일 일기와 12월 8일 일기에도 표피가 언급되어 있다. 표피는 일본 측에 건네줄 일종의 외교 물품으로 사용되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일본왕환일기(日本徃還日記)』
김한신, 2017, 「임진왜란기 강화교섭과 유성룡의 외교활동(1593.4-1595.7)」, 민족문화연구 77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