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회 코스미안상 은상 수상 소감]
어느 날 갑자기 이야기가 하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인 넋두리가 아닌 남들과 공감할 수 있는 글이 쓰고 싶었습니다. 일기 삼아 한 편 두 편 모아가던 중 우연히 코스미안뉴스를 접하게 되었고, 운 좋게 상을 받게 되었군요. 온갖 소음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 인문적 가치를 추구하는 매체가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기회를 주신 코스미안뉴스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반려동물 양육 인구 1,500만 시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려동물 양육 인구가 1,500만 명을 넘었다. 2024년 8월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총인구수는 5,100만 명 정도다. 국민의 30% 가까이가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현실화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첫째는 소득의 증가다. 생존의 절박함에서 벗어나면 누구나 여유를 갖고 싶어 한다. 절대빈곤은 먹거리 이외엔 그 무엇도 허용하지 않는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되기 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후진국이었다. 집집이 마당의 개는 넘쳐 났어도 방 안의 개는 찾기 힘들었다. 삼복더위에 단골로 등장하는 기호식품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안방 문턱을 넘어와서 한 식구로 자리 잡았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 덕분이다.
둘째는 가족구조의 변화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삶의 터전이 한 곳에 몰려 있지 않고 분산되었다. 그 결과 대가족이 핵가족으로 바뀌었다. 젊은 부부는 맞벌이해야 했고, 자녀 없는 가정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자녀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반려동물을 기르게 되었다. 인간관계의 미묘 복잡함과 달리 절대 충성을 바치는 동물과의 교감은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안식을 주는, 그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주인과 헤어진 후 1,000리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 진돗개, 일본 도쿄 시부야역에서 10년 동안 주인을 기다린 아키타견 하치코, 거리의 악사 ‘제임스 보웬’과 상처 입은 길고양이‘밥’의 우정 등등 인간과 동물의 교감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서 이미 동물권을 주장하도록 하고 있다.
셋째는 정(情)의 고갈이다. 삶이 각박하고 여유가 없어짐에 따라 사람 사이의 직접 교류가 줄어들었다. 어떤 이는 말한다, 문명의 혜택으로 소통이 더 활발해졌다고.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이는 외양일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손 편지를 쓰지 않고, 길을 묻지 않으며,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조차 기계음으로 듣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잃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해야 할 인간다움의 요람, 바로 정(情)이다. 약자에 대한 배려, 가난한 자에 대한 나눔, 고통받는 자에 대한 위로 등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차별화된 감정 아닌가. 그것의 원천인 정(情)이 나날이 말라가고 있다. 그래서 마음 둘 곳 없는 사람들이 정처(定處)를 찾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곧 반려동물 인구 1,500만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넷째는 출산율의 저하다. 구세대에선 한 가정의 자녀 수가 보통 3명에서 5명이었다. 그 이상도 제법 있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던 그 시절에는 가족공동체의 삶을 위해 모여 살았다. 그러나 이제 사회 환경이 달라졌다. 각자 독립된 삶을 살아야 한다. 문제는, 맞벌이가 아니면 -설혹 맞벌이라 할지라도-거처할 집 한 채조차 제대로 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신세대 젊은이들에게 자녀 양육과 교육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니 무자녀이거나 외자녀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고, 급기야 그 빈자리를 반려동물로 채웠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반려동물과의 공존은 이제 삶의 한 형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반려동물 양육에 있어, 공공의 차원에서 검토해야 할 것이 많으리라 사료된다. 반려동물 인구 1,500만 시대는 순기능 못지않게 역기능도 적지 않다. 경제적 부담, 환경오염, 유기 동물 관리, 소음 발생, 불의의 사고 등등이다.
우선 경제적인 부분을 살펴본다. 강아지의 평균 수명을 대략 15년으로 볼 때, 10년 전후가 확연히 다르다. 반려견의 경우, 10세 무렵부터 노견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사료와 간식, 옷, 약, 미용, 그 외의 것을 합해도 대략 10만 원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노견이 되면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다. 이는 사람과 똑같다.
상당수가 병치레하며 그 비용이 부쩍 늘어난다. 당뇨, 심장, 백내장, 결석, 관절을 비롯한 각종 치료비용과 특수사료는 매월 줄잡아 30만 원에서 50만 원이다. 정기 검사를 해야 할 경우는 건당 20∼30만 원 추가다. 특히 당뇨가 있는 반려동물은 합병증이 생겨 예측이 어렵다. 그런데도, 그 어떤 동물병원에서도, 의료수가의 적정성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이는 고스란히 반려동물 가구의 경제적 부담으로 돌아오고, 혹자는 기르던 동물을 유기하기도 한다. 애정이 식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키울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럴 것을 왜 키우느냐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이미 삶의 한 형태가 된 이상, 범정부적 차원에서 동물병원의 과다한 수가를 관리 감독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조처해야 할 것이다.
다른 문제들도 간과할 수 없다. 수많은 동물이 거리에서 공원에서 기타 여러 곳에서 변을 보고 짖어 댄다. 이를 마뜩잖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며, 충돌을 야기하기도 한다. 주인들이 슬기롭게 뒤처리한다고는 하지만, 방치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반려동물 허가제를 도입하면 어떨까 한다. 이는 동물권 보호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동물을 동반자로 생각하는 사람과 애완용으로 여기는 사람은 동물을 기르고 관리하는 데 있어서 천양지차다. 비록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더라도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유기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으로, 남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애완용으로 여기는 사람은 다르다. 전자와 달리 후자에겐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신권을 위해 인권을 희생하던 시대를 지나, 인권을 위해 동물권을 희생하던 시대를 지나, 인권과 동물권이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권의식에 갇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생명체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적어도 동물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연민과 동정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애(人間愛)완 다른 것이다.
앞으로 반려동물 동반 인구가 점점 더 늘어날 전망이다. 2023년 기준으로 펫코노니(Petconony) 시장 규모는 약 4조 원에 달하며 매년 1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인다. 2027년에는 6조 원이 넘을 것이라 예상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종합 대책을 마련해야 함은 당연지사다.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이웃과 조화로운 삶을 위해서도 그렇다. 이솝 우화의‘텐트 속으로 들어오는 낙타’처럼 점차 인간의 영역을 침범할 인공지능 시대에,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애에 목마른 현대인의 출구임이 분명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고육지책에 불과할 뿐이다. 새삼 강조하거니와, 동물과 문명이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는 현실은 결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인간관계의 소원함을 극복하려면 우리 시대를 이끄는 모든 힘의 중심에 인간이 있어야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인문학 교육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것이다. 대학에서조차 인문학과가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지금처럼 인문학이 실용주의에 밀려 서자 취급을 받는 한, 반려동물 인구가 늘면 늘수록, 인간관계는 더 삭막해질지도 모른다.
입시에서, 취업에서, 각종 생활의 장에서 폭넓은 인문적 소양을 갖춘 인재에게 인센티브를 주어 인문학이 실용주의에 맞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더욱더 선진화할 것이고, 군중 속의 고독감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