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회 코스미안상 은상 당선소감]
글쓰기라는 것이 나에게 무엇인가, 또 다른 이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늘 진지한 의문 속에서 글을 씁니다. 자본의 시대에 글쓰기가 무슨 돈벌이 수단도 못되고, 옛날처럼 식자들의 교양도 아닌 시대에 허명(虛名)을 좇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글쓰기의 목적은 참된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미와 실존의 탐구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강고한 사회구조에 맞서고, 그 사회질서 속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내는 작은 존재들을 보듬으며, 궁극적으로는 문명과 편안에 안주하려는 나태한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본질과 근원과 방법을 찾아가는 노력이 반영되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현대가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는 기후위기입니다. 우리 모두 삶을 전환하고 다르게 사는 방법에 대하여 일관되게 글을 쓰고자 합니다.
부족한 작품을 읽고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신문사 관계자들께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기후위기와 전환의 삶
삶을 통째로 바꾸는 것이 전환(transition)일진대, 그게 말처럼 그리 간단할 리가 없다. 몸에 밴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방식을 바꾸고 이에 따른 습성과 생각과 태도를 뒤집어엎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는 정치적 사고에서 생태적 스펙트럼으로 생각의 크기를 확대하고 생각의 깊이를 질적으로 변환하는 것이며, 인간이라는 종(種)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함께 생태계를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작은 모든 생명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큰 목소리의 웅변이나 이론적 탐구가 아니라 작더라도 밖에 나가서 직접 하나씩 실천해야 하는 일이다.
탄광 막장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들의 삶을 기록하여, 르포 문학의 백미로 인정받는, 조지 오웰이 저술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산업 문명의 기반이 석탄에 있다고 본 그의 시각은 탁견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노동자들의 험한 노동 조건을 고발한 위대한 오웰조차 가정 난방과 공장 기동과 전기를 생산하는 석탄의 무궁무진한 기능과 가능성에 탄복했을 뿐 그 석탄이 100여 년 후에 지구의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 될 것이라고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어떻든 산업혁명 시대에 모든 것의 해결사요, 구세주였던 석탄과 같은 화석 연료는 오늘날 모든 환경파괴와 기후재앙의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인류 생존의 기준이 되는 기온 1.5도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화석 연료와 핵연료 같은 경성 에너지를 재생에너지와 같은 연성 에너지로 바꾸는 에너지 전환 문제가 시급한 인류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즉 ‘성장 중심 탄소 기반 에너지 사회’에서 ‘탄소 중립 사회’로의 전환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석 연료에 기반한 에너지 시스템에서 ‘탄소 중립’ 또는 심지어 탄소 배출이 전혀 없는 ‘탄소 네거티브(carbon negative)’ 에너지 시스템으로의 변화는 단순히 하나의 에너지를 다른 에너지로 대체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에너지 시스템 전환은 우리 일상생활의 기초가 되는 전력, 운송, 건설, 폐기물, 음식 생산 등 전반적인 체계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기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 제도, 정보, 문화, 경제적 네트워크 집합체 전체가 포함된다.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중앙집중적인 에너지 시스템을 지역 분산적 에너지 시스템으로 바꾸는 일이다. 지역 에너지는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가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중앙집중식 에너지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환경적, 사회적 외부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다. 지방에서 생산되는 원전 전기를 서울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고압선으로 지방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일도 없어진다. 한마디로 ‘밀양 할머니’들의 고단한 투쟁 같은 것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는 뜻이다.
주택 태양광 사업은 이미 보편화되고 있다. 집에서 생산한 태양광 전기를 한전에 되파는 개인 전기업자도 많이 생겼다, 이제 시군별로 에너지협동조합이 하나 이상씩 설립되어 직접 전기 생산을 하고 있다. 지역 에너지는 에너지 문제에 대하여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해 결정하게 되어 에너지 의사결정의 민주성을 높이고 지역 에너지에 대한 통제력을 높일 수 있다. 지역주민들이 에너지 생산 활동에 참여하여 생산자가 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고 에너지 생산에 투입된 비용이 지역 안에서 순환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지역 에너지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지역 에너지협동조합의 향후 활동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오죽하면 기후 시민, 에너지 시민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정치적 자유와 권리의 획득과 행사라는 차원에서 논의되는 시민성(citizenship) 개념을 확대하여 2000년대 후반부터 에너지 시민성(energy citizenship)이라는 개념이 출현하였다. 에너지 시민성은 생태 시민성과 과학기술 시민성의 지향과 원칙을 공유하되, 민주주의를 에너지 영역으로 심화, 확장하면서 에너지 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부합하는 새로운 시민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공동체 에너지의 문제가 핵심이다.
1930년대 조지 오웰의 표현방식을 그대로 패러디한다면 현대문명은 콘크리트와 전기에 기초한 사회이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하드웨어라면 전기는 세상을 움직이는 소프트웨어이다. 따라서 현대 인류 위기의 탈출은 콘크리트 문명과 화석 연료 전기 문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말로만 떠들 수는 없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에너지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올여름을 나 보지 않았는가? 이 숨 막히는 올여름의 더위가 당신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시원한 날씨가 될 거라고 하지 않는가?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에 대응하여, 기온 1.5° 상승을 막기 위한 실질적 행동을 위해 국제적인 협약이 생긴 지 오래다. 협약의 시행을 위해 각국 정부도 이에 대행하는 ‘의제 21’ 같은 관련 기구를 만든 지도 오래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또는 당위적인 학자들의 주장이 아니라 정말로 시급한 정책 시행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타난 조치이다.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려던 정부 에너지 정책은 원전을 강화하는 쪽으로 되돌아갔다. RE 100으로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려는 세계적인 추세에 역행하는 방향이다. 정부의 이러한 오락가락하는 정책 탓으로 정작 위기에 빠진 것은 기업이다. 여차하면 에너지 규제에 걸려 수출이 막힐 판이다. 또한 시민교육도 기후 문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시민교육 영역이 기후와 에너지 부문이라는 이야기이다. 철저하게 ‘개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삶의 전환이 필요하다. 전환의 압력을 느껴야 한다. 좀 더 품을 팔아 알아보면 이런 것들을 지원하는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사업들이 있다. 햇빛과 바람을 모으고 빗물을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이것이 하나의 모멘텀 즉 기세로 작용할 수 있도록 내가, 우리가 먼저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너지 전환은 삶을 바꾸는 일이다. 인간의 욕망체계를 바꾸는 일이다. 나 중심의, 소비 중심, 육식 중심의 생활 패턴을 바꾸는 일이다. 지나친 육식을 줄이고 텃밭이나 옥상정원 등 소규모 자영 농업을 운영하거나 중앙집권적인 에너지공급방식을 태양광 같은 자가 발전으로 바꾸는 일이다. 전기와 물을 멀리에서 끌어오지 않고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그리고 지역에서 전기를 생산해서 쓰고, 가능하면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일이다.
나부터, 우리 마을부터 시작하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 집, 우리 마을부터 공동텃밭을 가꾸고 가정용 태양광을 설치해야 한다. 아파트 베란다에도 작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자. 단독주택의 경우 남은 지붕은 지역 에너지 협동조합에 임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전기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서 지열 냉난방을 시행하고 원거리에서 오는 수돗물 사용을 줄이기 위하여 빗물 저장 및 순환장치를 설치할 수도 있다. 돈만 모으는 게 아니라 바람도, 물도 햇빛도 모아 에너지로 전환해야 하는 시기에 살고 있다. 이것이 전환이고, 전환의 시작은 바로 나 자신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