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야~ 우리들은 단군의 자손
모두야~ 우리는 코스미안
지난 10월 27일, 제6회 코스미안상 시상식을 ‘세종문화회관, 가온’에서 시행했다. 코스미안뉴스 신문사에서 주관해 온, 1년에 한 번 시행하는 여섯 번째의 거사였다.
‘마음이 지향하는 데로, 삶을 이행하는 우주적인 인간의 행보, 삶의 지속을 통한 어울림과 아우름의 철학, 코스미안사상’을 맥락으로 펼친, 이 코스미안사상을 ‘글자와 단어와 어휘와 문장으로 얽은 말(언어)의 원단(原緞), 꽃 중의 꽃을 가려 세상에 펼치는 행사였다.
이 행사에 뒤이어, 미리 펼쳐낸 이정표 하나가, 앞으로 이행하고자하는 ‘코스미안 7대지향점’이다. 이 지향에 걸 맞는 노래, <달도 하나 해도 하나>가, 오늘 유차영의 아랑가, 스토리텔링 포인터이다.
<달도 하나 해도 하나>는 1945년 제2차세계대전 종전과 동시에 우리나라 한반도 허리에 그어진 38도선을 한탄하며 남북한 통일을 염원한 노래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천왕제를 포함한 조건이 없는 패배였다. 항복이었다. 히로시마 상공의 불꽃, u-235 리틀보이 우랴늄 원자폭탄, 후쿠오카 하늘의 섬광 p-239 플로토늄 원자폭탄의 불화염이 세상에 처음으로 번쩍거린 날이다.
이에 1945년 8월 9일, 일본 전쟁지도본부는 무조건 항복을 의결한다. 이 결정에 울분을 참지 못한 당시 일본 육군참모총장은 할복 자결을 한다. 십여 명의 일본군 학도병이 이에 따른다. 그날, 전쟁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소련은, ‘팔월의 폭풍 작전’이라는 작전명칭을 기치로, 극동함대를 청진항에 접안하고 상륙을 감행하여 청진방송국을 장악한다. 그 시간 극동군 육군은 두만강을 도하하여, 지상군을 남쪽으로 진군시킨다.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향한 공격이었다. 이에 당황한 미군, 에이브람 장군은 한반도 지도 허리에 검정색 줄을 긋는다. 서해안 옹진반도에서 동쪽,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까지. 30여 분만의 결행이었다. 38선이다. 이 선 이남으로 소련군의 진출을 저지한다는 전략적 작전개념의 표식이었다.
전쟁 중에 그은 가상의 위도 선, 군사지도 위의 실선은, 이후 이념의 상극성과 민족의 동질성의 경계선으로 굳어버렸다.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지 못하는 철책, 녹이 슬은 철책선 위로 구름과 새들만 오고가고 있는 세월이, 38선 설정 기준으로 79년이 흘러갔다. 6.25전쟁 발발 기준으로는 74년, 끝나지 않은 전쟁 휴전협정 체결로는 71년의 세월이 흘러간다. 지금의 휴전선, 근원 선이다.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사랑도 하나
이 나라에 바친 마음 그도 하나이련만
하물며 조국이야 둘이 있을까 보냐
모두야 우리들은 단군의 자손
물도 하나 배도 하나 산천도 하나
삼천리에(이 나라에) 뻗친 혈맥 그도 하나이련만
하물며 민족이야 둘이 있을까 보냐
모두야 이 겨레의 젊은 사나이
간 길 하나 온 길 하나 갈 길도 하나
울부짖는 군호 소리 그도 하나이련만
하물며 생사인들 둘이 있을까 보냐
모두야 새 나라의 용감한 일꾼.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이 절창은, 6.25전쟁 이전에 남북통일을 염원한 유행가의 첫 번째다. 해방광복이후 남인수가 처음으로 부른 노래 <가거라 38선>(1947년, 1948년 발표설 있음)은, 통일 기원보다는 오고가지 못하는 남북한 상황을 한탄한 곡조였다.
이 절창은 아세아레코드 음반 1001호, 해방광복 이후 남인수가 자기 자신의 레코드사를 설립하고 발매한 음반 1호에 실린 노래다. 이 노래는, 조국·단군·삼천리·민족·겨레·새나라 등등의 단어가 유행가사의 어휘라기보다는 국민 계도가요에 실릴 법한 말들로 다가온다.
노랫말을 지은 김건은 1912년 서울 출생의 김창기다. 그는 6.25전쟁 중에 북한으로 간 것으로 추정한다. 사실일 테다. 입북일까. 납북일까. 이들처럼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북으로 끌려간 이들이 8만7천여 분이다. 조소앙, 정인보, 김해송, 이규남... 그 이전에 조명암, 박영호 등등의 이름이 줄줄이 이어진다.
이러한 맥락에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절의 친일적 행적들과 오버랩 된다. 복잡하다. 신탁과 반탁의 주창들, 임시정부를 위시하여, 세계만방에서 독립과 광복을 외치던 이들이, 무궁화와 태극 깃발을 절규하며, 귀국 행렬을 지을 때이다. 이 시기가, 우리나라 근대와 현대사의 징검다리 시기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 1945년 해방광복까지를, 우리의 근대시기로, 1945년 후반기부터를 현대사의 서단으로 치면 그렇다.
주한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 중장, 미 육군 제 24군단장 휘하 6사단 7사단 40사단 17만여 명이 한반도 38선 이남 300여 곳에 주둔하면서, 군정(軍政)을 펼치던 시절이다. 이들은 1949년 6월 30일을 기점으로, 고문단 500여 명만 남기고 본토와 일본으로 철수했다. 이후 7개월여 만에,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미국의 극동방어선에 한반도와 대만은 예외로 한다는 선언과, 지도상의 가상 선을 발설한 것이다.
그로부터 5개월 13일 만에,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면에 대하여 기습남침 공격을 개시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0분이다. 저들의 공격결심지도, 작전명칭은 ‘폭풍’이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태평양전쟁 개입을 선언하면서 한반도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향하여 공격을 해온 작전명칭, ‘8월의 폭풍작전’에서 따온, ‘폭풍’이었다.
그로부터 3년 1개월 1,129일~ 이것이 6.25전쟁이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러한 전후의 맥락, 그 당시 조국분단의 현실을 감안하면, 통일의 염원을 담은 노래,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유행가 아랑가를 지은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 글의 서두에서 펼친 ‘코스미안뉴스, 7대 코스미안 프로젝트’ 지향은 이렇다. 한반도와 우리 민족의 ‘자주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정치철학적 메카니즘 형상화, 코스미안사상을 지도 교육 설득 공감할 시공간적 도량 마련, 이에 대한 사회적 공감의 상징인 코스미안상의 글로벌화, 한반도의 천연 생태 현장인 비무장지대 DMZ에 코스미안평화공원 조성, 세종대왕의 혼이 응어리진 한글의 세계 공용언어 선정, UN을 대체할 CU(Cosmian Union) 본부 서울에 설치, 세계를 평화적으로 화합하게 할 세계정부를 서울에 설립’하는 것이다.
역사는 한 사람의 열정이 씨앗이 되어 변하고, 이행된다. 개인의 열정에 동행이 따르고, 동행은 유행의 바람결을 만들고, 유행은 문화로 이행되며, 그 이행된 문화의 뒤에는 역사의 갈레가 굽이진다. 이것이 호모사피엔스 5만여 년의 역사 자국이다. 그 세월의 길섶에 230억 명이 잠들어 있다. 코스미안사상은, 그런 지향이다. 코스미안뉴스는 그런 메카니즘의 레이아웃 장이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가 다시 씨앗으로 새싹을 틔울, 철학의 밭(田)이다. 사상의 논(畓)이다.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노래가 탄생한, 통일을 염원하는 씨앗의 밭과 논이 된, 그 시절~ 1947년 고려레코드가 해방 이후 최초의 국산 음반제작에 성공한 후 음반업계에 진화의 속도가 붙는다. 음반사를 설립하거나 운영을 주도한 이들은 그 당시 대중음악계에 몸을 담고 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작사가 겸 녹음기사인 야인초가 설립한 코로나레코드, 작곡가 이병주가 설립한 오리엔트레코드, 작곡가 박시춘이 운영을 맡은 럭키레코드, 가수 남인수가 설립한 아세아레코드가 대표적인 예다. <달도 하나 해도 하나>를 작곡한 이봉룡은 1914년 목포에서 출생하여 1987년 72세로 서울에서 타계했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으며, 막내딸이 이민자로 가수였다.
1956년 미국에 진출한 김시스터즈 중의 한 명이다. 3명 중 2명은 이난영·김해송 사이에 태어난 두 딸이다. 애자·숙자·민자 3자매다. 이봉룡의 친 동생이 두 살 아래 이난영이다. 매제는 김해송(가수 겸 작곡가), 이봉룡은 매제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의 대표곡은 <목포는 항구다>, <낙화유수>, <인생선>, <남아일생>,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등. 어릴 때 이름은 이봉용(李鳳用)이었고, 훗날 호는 산남(山南)으로 썼다.
그는 6.25전쟁 중에 매제 김해송이 행방불명(납북 추청)되었을 때, 동생 이난영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이난영은 7남매를 혼자 키우며 어렵게 생활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도 김해송은 북한군에게 사살되었다는 소문만 남긴 채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남긴 유행가들에는 월북 작가의 작품으로 낙인찍히고, 작사 작곡가의 이름이 바뀌어 진다. 처남 이봉룡의 이름으로 바꾸어 살아남은 곡들은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고운봉의 <선창>, 백년설의 <고향설>, 이화자의 <화류춘몽> 등이다.
이봉룡은 1956년 대한레코드작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1958년 센츄리레코드 전속작곡가로 있었으며 음반기업을 운영하다가 1960년대 후반 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하여 생활했다. 1961년부터는 엘케엘(LKL)레코드를 운영하기도 했다. 1969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음악활동을 중단했고, 1986년 잠시 귀국하여 여관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1월 9일 사망했다. 72세였다.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이런 노래가 아랑가의 진수이다.
[유차영]
한국아랑가연구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글로벌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경기대학교 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교수
이메일 : 51944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