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강화협상 기간인 1596년 당시 체찰사 이원익과 통제사 이순신은 윤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전라도 일대를 순시하였다. 그들 일행이 순시한 경로는 『난중일기』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들 일행은 순시 기간인 9월 3~5일경 나주에 머물면서 나주향교를 방문하였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6년 9월 4일
나주에 머물렀다. <<중략>> 이날 아침 체찰사(이원익)와 문묘를 찾아 뵈었다.
[원문] 留羅州 <<중략>> 是朝 与体相謁聖
위 『난중일기』 기록의 원문에 보이는 '알성(謁聖)'이라는 표현은 '공자와 그 제자 등을 모신 문묘(文廟)를 참배하는 일'을 가리킨다. 유교를 숭상하던 국가였던 조선에서는 문묘를 참배하는 일이 자주 있었던 행사로서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조선시대 문헌을 검색해보면 '알성(謁聖)'이라는 표현이 적잖이 나타난다.
체찰사 이원익과 통제사 이순신이 머물렀던 나주에는 서울 성균관의 모습을 본떠 지었다고 전해지는 나주향교가 있으며, 나주향교의 문묘인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를 위시한 여러 성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나주향교는 적어도 태종 초년 무렵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비록 여러 차례 중수를 겪었지만, 본래의 위용을 간직한 건축물들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특히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은 규모가 성균관의 그것과 비교될 정도이다. 나주향교는 전남 나주시 교동에 위치해 있으며, 대성전은 보물 제394호 나주향교대성전으로 지정되어 있다.

향교는 고려시대 인종 때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충렬왕 때부터 성리학의 전래 등으로 유학 교육이 부흥하게 되자 향교는 차츰 안정되어 갔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향교가 더욱 정비되고 발전되었다. 수령이 파견되는 고을에는 관학인 향교를 반드시 설치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향교는 대부분 태조·태종·세종 시기에 건립되었다.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모든 고을에 향교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최소한 성종 때 전국의 모든 고을에 향교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서울 성균관은 조선이 건국된 뒤인 1398년 지금의 서울 명륜동에 세워졌다. 그뒤 140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409년에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다시 성균관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는데, 그 뒤에 재건할 때 나주향교를 참고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나주향교는 나주 북쪽에 있는 진산인 금성산의 서북쪽 줄기인 장원봉 아래 자리에 그 터를 잡았다. 나주향교는 전라도의 중심 교육기관으로서 여러 나주목사와 양반사족에 의해 유지 및 발전되어왔다. 세조 때에는 나주향교가 크게 수리되었으며, 선조 때에는 나주목사 유몽정(柳夢鼎, 1527∼1592)이 향교를 수리하고 또한 나주목사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교육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나주향교는 정유재란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는데, 1630년에 당시 나주목사 장유(張維, 1587~1638)는가 이를 수리하였다.
체찰사 이원익과 통제사 이순신이 나주향교를 방문한 일은 당시 조선시대의 선비 문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본 칼럼의 나주향교 관련 내용은 2014년에 출간된 『향교석전』(국립무형유산원)에 수록된 내용을 주로 참고했음을 밝힌다.
[참고자료]
국립무형유산원, 『향교석전』, 2014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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