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활쏘기에 관한 기록이 수백 차례 나타나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이 휘하 장수들과 활쏘기를 즐겨 했으니 그 휘하 군사들도 당연히 활 쏘는 연습을 많이 했을 것이라는 추정 또한 식상할 정도로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난중일기』에 언급된 활쏘기가 1595년부터 조금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점을 인지한 분들은 그리 많지 않다.
『난중일기』의 1592~1594년 기록은 대부분 '활을 쏘았다'라는 말을 '射帿(사후)'로 표기하였다. 다음은 그러한 기록 가운데 하나이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14일
동헌에 나가서 업무를 본 뒤에 활을 쏘았다.
[원문] 出東軒公事後射帿.
위 기록에 보이는 원문 ‘射帿’에 언급된 ‘帿’는 활을 쏠 때 표적으로 내거는 베(射布)를 가리킨다. 후(帿)를 쏠 때 사용되는 화살은 끝이 둥글고 뭉툭하게 만들어진 연습용(習射)으로 제작된 목전(木箭)이다. '사후(射帿)'는 무과의 시험과목 가운데 하나로서 그 규정과 후(帿)의 종류 및 규격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가례의식(嘉禮儀式)」-「무과전시의(武科殿試儀)」에 상세히 정해져 있다.
‘射帿’라는 표현은 『난중일기』의 1592~1594년 기록에 거의 100차례 가까이 나타난다. 또한 ‘射帿’는 1595년 일기에는 70여 차례, 1596년 일기에는 60여 차례나 언급되어 있다. 즉,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시기 내내 훈련과 유희를 겸하여 활쏘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1595년 일기부터는 철전(鐵箭)과 편전(片箭)을 쏘았다는 기록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철전은 둥글고 날이 없는 쇠촉이 달린 화살로서 그 무게에 따라 육량전(六兩箭), 아량전(亞兩箭), 장전(長箭)의 3가지 종류가 있었다.
편전은 통전(筒箭) 또는 애기살 등으로 불리던 짧은 화살로서 단면이 U형인 통아(筒兒)라는 나무 대롱에 넣어서 발사하였다. 편전은 영화나 TV다큐멘터리 등에서 자주 소개되곤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난중일기』의 1592~1594년 기록에도 편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이순신이 편전으로 활쏘기를 했다는 기록이 명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1595년 일기부터이다. 다음은 철전과 편전을 쏘았다는 내용이 있는 『난중일기』의 1595년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5년 7월 2일
늦게 활(목전) 10순을 쏘았다. 또한 철전 5순과 편전 3순을 쏘았다.
[원문] 晩 射帿十巡. 又射鐵箭五巡 片箭三巡.
* 1순(巡)은 5발의 화살을 쏘는 것을 의미한다.
『난중일기』, 1595년 7월 20일
오후에 나가서 업무를 보고 활(목전) 5순, 철전 4순을 쏘았다.
[원문] 午後 出坐公事 射帿五巡 鐵箭四巡.
『난중일기』의 1595년 기록에는 편전을 쏘았다는 내용이 1차례, 철전을 쏘았다는 내용이 4차례 나온다. 『난중일기』의 1596년 기록에는 철전과 편전을 쏘았다는 내용이 각각 5차례 보인다. 한가지 눈여겨볼 사실은, 이들 철전과 편전이 언급된 기록이 모두 철전, 편전, 목전 3가지 화살을 함께 쏘았다고 서술한 점이다. 다음은 철전, 편전, 목전이 언급된 1596년 일기의 기록 가운데 하나이다.
『난중일기』, 1596년 6월 25일
일찍 나가서 공문을 처결하여 보낸 뒤에 조방장(김완)과 충청우후(원유남), 임치첨사(홍견), 목포만호(방수경), 마량첨사(김응황), 녹도만호(송여종), 당포만호, 회령포만호, 파지도권관(송세응) 등이 와서 철전 5순, 편전 3순, 목전 5순을 쏘았다.
[원문] 早出 公事題送後 助防將及忠淸虞候臨淄僉使木浦萬戶馬梁僉使鹿島萬戶唐浦萬戶會寧浦萬戶波知島等來 鉄箭五巡 片箭三巡 帿五巡. 南原金䡏告歸. 是昏 極熱流汗.
충무공 이순신은 『난중일기』의 1596년 기록에서 철전, 편전, 목전의 3가지 화살을 하나로 묶어 '三貫'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6년 7월 7일
경상수사(권준)와 우수사(이억기)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와서 3가지 과녁을 설치하고 잠시 활을 쏘았다.
[원문] 慶尙水使及右水使 与諸將幷到 暫設射三貫.
위 기록에 보이는 ‘三貫’은 목전, 철전, 편전의 화살이 각기 사용될 3가지 과녁(貫革)을 말한다. 『경국대전』의 「병전」-「시취(試取)」에 따르면 이 3가지 화살은 과녁까지의 거리가 각각 240보, 80보, 130보로서 다르기 때문에 과녁을 세울 때 각기 따로 설치해야 한다. 『난중일기』의 번역서들이 종종 ‘三貫’을 ‘3번 맞추었다’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맞추었다’라는 의미를 보통 ‘中’으로 표현하였다. 『난중일기』의 1595년 5월 10일과 5월 16일 기록에서도 ‘맞추었다’라는 뜻이 ‘中’으로 표현된 사례가 확인된다. 특히 『난중일기』의 1596년 7월 28일 기록은 ‘三貫’이라는 표기와 함께 철전, 편전, 목전을 언급하여 ‘三貫’이 철전, 편전, 목전이 사용될 3가지 과녁을 가리키는 말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6년 7월 28일
늦게 충청우후(원유남)과 함께 3가지 과녁을 쏘았는데, 철전은 36분, 편전은 60분, 목전은 26분, 도합 123분이었다.
[원문] 晩 与忠淸虞候 同射三貫 鉄三十六分 片六十分 帿二十六分 合一百二十三分.
* 이 기록은 점수 합계를 123분으로 서술하였지만, 실제 합계는 122분이다. 합계를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난중일기』의 1596년 기록에는 '三貫'을 쏘았다는 기록이 총 7차례 나온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철전, 편전, 목전 3가지 화살을 쏘았다는 기록은 5차례가 나오는데, 이 5차례의 기록 가운데 1가지 기록은 '三貫'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난중일기』의 1596년 기록은 철전, 편전, 목전 3가지 화살을 쏘았다는 기록이 총 11차례 나온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활쏘기를 할 때 1595년부터는 철전, 편전, 목전 3가지 화살을 함께 쏘는 연습도 하게 된 이유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선조실록』의 1594년 기사(50권, 선조27년-1594년 4월 13일 신유 3번째 기사/53권, 선조27년-1594년 7월 5일 신사 1번째 기사)에 따르면 당시 조선 조정은 서얼(庶孽:첩이 낳은 자식)과 공사천(公私賤: 관청이나 개인에게 속한 노비)의 무과 규정에 철전과 편전 등을 포함하였으며, 수문장(守門將)·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 등이 연습할 때 철전과 편전 등으로 시험 보는 규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즉, 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무관들에게 철전과 편전을 이용한 활쏘기를 장려하는 정책을 제정한 셈인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충무공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주제이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2004, 가람기획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