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찍이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명작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 “위정자들이란 결코 국민을 위하는 자들이 아니고 그들 자신의 단순한 권력욕, 더러운 물욕과 세속적인 지배욕에서 백성을 노예로 삼아 그들의 초호화판 대 궁전을 짓겠다는 과대망상증 환자들일 뿐”이라고 갈파했듯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제1, 제2, 제3세계나 개발국, 개발도상국, 저개발 국가들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밝은 유식층, 세상 물정에 어두운 무식층, 그리고 잘못된 사상과 정보로 세뇌되고 오도된 우중(愚衆)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소말리아 작가 누르딘 화라는 말한다.
그의 관찰로는 세계의 많은 나라 국민들이 대부분 정확한 정보나 지식에 접할 기회가 없을뿐더러 소수의 지배계층이 고의로 틀린 정보와 허위 사실 또는 비틀어 곱새긴 왜곡 조장된 ‘여론’으로 국민을 속여 통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확한 사실 정보 기근은 정신적으로 영양 실조된, 착취 이용당하기 쉬운 부류의 인간을 만들어 놓기 때문에 이들은 깜깜절벽 동서남북을 분간 못하고 뭐가 뭔지 잘 모르거나 알아도 아주 잘못 알고 있어 소수 특권 지배층이 선택해 주는 삶 이외의 삶을 상상조차 못 한다고 1979년 출간되어 1980년도 ‘영어권 문학상(English-speaking Union Literary Award)’을 수상한 그의 저서 ‘달고 신 우유’에서 그는 말한다.
최근에 개발된 기술문명의 산물, 팩시밀리, 복사기, 컴퓨터, 인터넷 등의 실용화로 물론 사정이 크게 달라졌고, 그 대표적인 예로 소련연방 붕괴를 들 수 있겠지만 얼마 전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살아 온 아니 아직도 살고 있는 한반도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세습제 왕국의 제물이 되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상상 좀 해보자.
나이 80세 먹은 고령의 한 노인이 기존 사회질서와 규범에 항거, 한밤중에 가족과 집을 떠나는 장면과 나이 30세를 갓 넘긴 한 청년이 방랑자가 되어 전국을 유랑하며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인정적 물질적 사슬을 다 끊어 버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약속하는 것을 상상해 보자. 이 두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도록 순진한 개혁가들인 톨스토이와 그리스도가 오늘날 이 세상에 살았더라면 틀림없이 독방 감옥이나 고문실 아니면 특수 정신병원에 감금되었으리라.
이와 같은 냉소적인 관찰은 남편의 석방을 탄원하는 타티아나 풀루쉬의 편지 속에 들어있다. 다른 많은 소련의 반골들처럼 우크라이나 지방 출신의 수학자인 레오니드 풀루쉬는 전체주의 정권이 행사하는 비인도적인 횡포와 죄악에 반기를 들었다고 정치범으로 특수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소련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 국시에 반대하는 그의 이상주의적 인도주의는 그를 진찰하는 정신과 의사 눈에 나태한 정신분열증으로 밖에는 안 보인다. 그가 정신병원에 들어갈 때는 정신이 멀쩡하고 몸도 건강했었는데 부인 타티아나의 불요불굴의 집요한 노력과 하늘의 도움으로 마침내 석방되어 출국할 때는 그는 숨 쉬는 송장에 불과했다. 조금만 더 그를 감금해 두었더라면 그들이 진단한 대로 그는 정말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고 말았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내 심신의 건강이 악화일로를 달리다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까 봐 나는 두려웠다. 내가 정말 미쳐 버려 날 고문하는 자들을 돕게 될까 봐.”
이렇게 ‘역사의 축제: 한 반골의 자서전’에서 저자 레오니드 풀루쉬는 말한다. 그가 부조리의 연극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부조리의 연극 드라마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현실성을 나타낸다고 그는 본다. 예술과 문학에 관한 여러 가지 그의 관찰이 흥미롭다. 그의 다양한 관심과 흥미가 그를 돌보는 정신병원 의사와 간호사 눈에는 정신분열증 증상으로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의 자서전엔 그가 받은 고통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물론 말하면 잔소리 같아 생략했겠지만, 독자는 그 행간에서 뿌리 깊은 그의 의분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소련 공산주의 사회의 갖가지 불공평과 부정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란 말뿐인 것과 그 이름뿐인 것을 말이다. 그래서 집권층 자녀들이 다니는 유치원을 비롯한 특수학교에 매일같이 크리미아 지방에서 특별 수송기로 싱싱한 과일과 채소 등이 배달되는 사실이 스탈린 시대에 저지른 만행 못지않게 그를 격분시킨다.
또 한 가지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은 인종적인 편견과 소수민족문화의 말살 정책이다. 특히 그의 출신 지방인 우크라이나와 기타 소수 민족들에 대해서다. 동북 시베리아 지역의 야쿠트족을 예로 들면 이들은 이 지방을 찾아오는 백인들 보고 이들의 부인들과 동침해 애를 배게 해달란다. 왜냐하면 백인이 제일이라고 교육받고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결점 없는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젊었을 때 그는 공산당의 열성 당원이었다.
아직도 그는 확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다. 그의 ‘역사의 축제’에서 그는 자유주의적인 마르크스의 말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독일의 사회주의자 마르크스가 ‘종교는 백성의 아편’이라고 말한 후 그렇지만 종교는 또한 ‘무정(無情)한 세상의 유정(有情)한 마음’이라고 부언한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예부터 배신당한 신자나 친구보다 무서운 적은 없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구(舊) 소련 정치 체제는 지배인들로 구성된 집권층이 온갖 특권을 다 누리는 단순히 ‘추상적인 자본주의’ 일 뿐이다. 이데올로기가 공리공론 정치로 변질되었고 하나의 말씨 어법이 되어, 인종, 계급, 충성 따위를 간파하기 위해 시험해 보는 물음말, 당파의 구호, 표어의 동결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하에서는 마르크스나 니콜라이 레닌 같은 혁명가들은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특수 정신병원 독방에 감금되었을 것이라며 그는 자기와 같은 한 반체제 인사 아르카디 레빈이 재판받는 법정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한다. 검사가 몇 번씩이나 피고인 레빈이라 할 것을 피고인 레닌이라 부른 것이다.
한 세기 전에 나온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비추어 볼 때 풀루쉬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과 소련혁명의 주역들에 대한 그의 신앙은 순진해 보인다. 그의 탁월한 재능과 날카로운 지성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고유의 전통적인 ‘거룩한 바보’의 이미지가 이 ‘역사의 축제’ 저자를 감싸고 있다. 물론 이 ‘거룩한 바보’가 저 ‘사악한 바보’인 그의 박해자보다 무한히 낫겠지만 말이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