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미국에선 출판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크게 물의가 일고 있다. 1960년 출간된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애독서가 되어 온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정의로운 변호사로 자녀들의 롤모델이었던 애티커스 핀치가 55년 만의 신작 ‘파수꾼’에서는 인종주의자로 묘사되어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치듯 쏟아지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앵무새 죽이기’보다 2년 전에 쓰여진 습작 같은 ‘파수꾼’에서 ‘앵무새 죽이기’ 같은 고전적인 걸작을 이끌어낸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음을 심층 취재해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이 숨은 역할을 한 사람은 편집자 터리즈 폰 호호프 토리다. 직업상으로는 Tay Hohoff로 불렸다.
짐작건대 현재는 양로원에서 노후를 지내고 있는 저자 하퍼 리가 20대 젊은 날에 쓴 원고 ‘파수꾼’을 보고 편집자 테이 호호프가 그 어둡고 부정적인 내용을 독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있는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고쳐 쓰도록 적극 독려했으리라. ‘파수꾼’에서 백인우월주의 테러 단체 KKK에 가담하고 인종차별제도 폐지를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깜둥이가 차떼기로 우리 학교, 우리 교회, 우리 극장에 몰려오면 좋겠느냐”고 딸 진 루이스 핀치(별명은 스카우트)에게 소리 지르는 인종주의 골수분자 애티커스가 ‘앵무새 죽이기’에서는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남성을 감동적으로 변호하는 아주 훌륭한 인물로 그리도록 말이다.
그러고 보면 모두가 다 ‘보이지 않는 손’ 아니 ‘보이지 않는 공정한 머리’와 ‘보이지 않는 따뜻한 가슴’이 필요하지 않은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각자는 다중인격자라 할 수 있다. 애티커스의 빛과 그림자 양면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단지 앵무새를 죽이고 살리느냐가 우리 개개인 각자에게 달렸다.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어느 국가 여느 사회에서든 마찬가지겠지만 세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미국만 보더라도 밝은 면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면도 여전히 현존하고 있다. 또 요즘 백인사회에 괴담이 나돌고 있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주류 언론이 보도에 나섰다.
그 발단은 7월 15일 시작된 미군 특수전 사령부의 군사훈련 '제이드 헬름 15'가 해외의 적대 세력이 미국에 침투하는 가상 상황을 설정해 미 육군 그린베레, 미 해군 네이비실 등 특수부대 1,200여 명을 투입해 소탕하는 작전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작전훈련이 보수 백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텍사스, 뉴멕시코, 유타주 등 공화 강세 지역에서 벌어지자 음모론이 퍼지게 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군사훈련을 빙자해 병력을 투입한 뒤 텍사스주에 계엄령을 선포할 계획이며, 이를 통해 내년 대선을 취소하고 장기 집권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텍사스주의 월마트 건물 지하엔 군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한 비밀 땅굴을 팠다느니, 남부연합기를 내걸면 체포된다느니, 군이 개인 소유 총기를 압수한다는 둥 온갖 유언비어가 훈련 예정 지역에 잇달아 유포됐다. 뉴욕타임스가 한 베트남전 참전용사는 자기가 소유한 총기를 땅에 묻어 숨겼다느니, 누구는 군과의 전투에 대비해 탄환 2만 발을 구입했다는 텍사스 현지 주민들의 얘기를 전하는가 하면 워싱턴포스트도 오바마는 공산주의자가 키웠고 테러리스트가 교육시켰다는 소도시 바스트럽의 분위기를 보도했다.
이런 음모론은 말할 것도 없이 흑인 대통령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보수 백인사회의 뿌리 깊은 반감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흑인 대통령이 미국에서 나왔듯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흑백격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공공연히 실시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등장하지 않았었나.
그리고 전태일이 분신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한국에서도 비록 결국 투신자살로 끝나고 말았지만, 가방끈도 짧은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서민대통령이 되지 않았었나. 언제 어디서나 밝은 면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면도 있게 마련이다. 비교적 객관적일 것 같은 다큐멘터리도 어느 면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나지 않든가.
그러니 사람은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고 찾는 것만 눈에 띄게 되나 보다. 어느 쪽을 죽이냐에 따라 그 반대쪽이 살아난다면 세상의 명암도 각자의 명암도 결정되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 빛을 위해 어둠도 있는 것이리. 그렇다면 인위적인 아무런 고정관념도 선입견도 편견도 없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明善以復初이 우리 삶 속의 선을 밝히는 길이리라.
웰즈리대학 졸업식 축사하면서 나이지리아 작가 치마만다 고지 아디치는 졸업생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명문 대학 출신이라는 자부심의 특권의식은 눈을 멀게 한다고. 그러면서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말을 인용했다.
“우린 특전이란 특별한 의식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 부자들이 돼지처럼 꽥꽥 소리 지르면 그들이 비명을 지를수록 더 좋은 일이다.”
이게 어디 학벌뿐이랴. 모든 명예와 직함도 마찬가지이리라. 특히 인간의 정신생활을 지배하는 종교적인 지도자의 경우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맹점을 잘 극복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기독교 정신과 불교사상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프란체스코 교황과 현 14대 달라이 라마, 이 두 사람의 언행을 보면서 어쩌면 이들이 바로 재림한 예수나 환생한 석가모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 두 사람의 한 가지 공통점은 둘 다 페미니스트란 점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대변자가 될 수 없고 신과 인간 사이에 거간꾼 브로커가 있을 수 없다는 내 생각에 변함은 없지만, 그래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어도 나쁠것 없다면 프란체스코 교황과 달라이 라마 희망대로 다음엔 여성 교황과 여성 달라이 라마가 나왔으면 좋겠다. 조물주 신이 있다고 가정해서 신성이 있다면 그리고 꼭 성별을 가려야만 한다면, 신성은 남성보다는 여성에 가깝다고 해야 하리라.
그래서 서양에 이런 말이 있나 보다. '신이 무소 부재할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 여성은 뭣보다 모성애를 상징하지 않는가. 사랑 이상의 종교도 철학도 예술도 문학도 없다 할 것 같으면, 그리고 인간의 탈을 쓰고 지상에 나타난 신이라면 남성이기보다는 여성이리라. 또 그래서 흔히 세상은 남성이 움직이지만, 남성을 움직이는 것은 여성이라 하나 보다. 이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여성에게서 비롯한다는 말인 것 같다.
‘행복: 역사적인 고찰’에서 역사학자인 저자 다린 엠 맥마흔은 서양문명이 탄생한 옛 희랍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대 희랍인들이 유대모니아라고 부른 행복한 삶이란 이성을 따라서 선행을 쌓으며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틀은 생각했다. 에피큐러스학파는 즐거운 삶이 잘사는 삶이라고 했다. 이 학파의 창시자 에피큐러스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보리떡과 물 그 이상 더 필요하지 않다고 했듯이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한 것처럼 쾌락주의자들이 아니고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가 하면 스토아학파는 아무리 삶의 환경이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인간은 이를 극복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실천했다. 그 후로 중세에 들어와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쾌락을 멀리하고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현세가 아닌 내세에 신의 품에 안겨 행복할 수 있다고, 행복이란 현세에선 불가능하고 내세에 신의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신앙이 강요되었다.
그러다 르네상스를 맞아 '행복'을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끌어 내리게 되었고, 그 후로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 독립 선언문에 적었듯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빼앗길 수 없는 인권인 동시에 개인이 재산을 취득하고 소유할 권리를 갖게 되면서부터 자본주의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무절제하고 무분별한 자연자원 개발을 통해 지구 생태계가 파괴되기 시작해 오늘날 우리가 기후변화에 직면하게 되었고, 승자독식의 부익부, 빈익빈, 금전만능이란 인류 최대의 비극을 초래하게 되지 않았나. 그렇다면 우리 인류 모두가 다 같이 잘 살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이 전적으로 바뀌어야 할 절박한 시점에 도달하지 않았는가.
전쟁과 폭력, 정복과 착취, 밑도 끝도 없는 탐욕으로 표출되는 남성성을 평화와 사랑으로 만인과 만물을 포용하고 육성하는 여성성으로 전도할 중차대한 시점 말이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