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식 칼럼] 집단지성의 시대

김관식

집단지성(集團知性, collective intelligence)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다수의 개체들의 협력 또는 협업을 통하여 얻게 된 집단적 능력을 뜻하는데, 이를 집단지능, 협업지성, 공생적 지능이라고도 한다. 

 

미국의 곤충학자 윌리엄 1910년 모턴 휠러의 저서 『개미:그들의 구조·발달·행동』에서 처음 제시하였다. 그는 조그만 개체의 개미가 공동체로서 협업하여 거대한 개미집을 만들어내는 것을 관찰하였고, 이를 근거로 개미는 개체로서는 미미하지만 군집을 이루면, 높은 지능체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하였다. 

 

1920년 사회학자 피에르 레비(Pierre Levy)가 본격적으로 집단지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여 사이버 공간에서의 집단지성 개념을 정리했다. 그는 존중을 바탕으로 한 다른 사람의 세계와의 불가해하고 비환원적인 만남에 대해 피에르 레비는 오늘날 기업, 학교, 대학, 지역에서 자라고 있는 지식의 나무라고 설명하면서, 집단지성에 대해 “그것은 어디에나 분포하며, 지속적으로 가치가 부여되고, 실시간으로 조정되며, 역량의 실제적 동원에 이르는 지성”이라고 정의했다.

 

역사적으로 집단지성의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다. 시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격언이 있듯이 집단지성의 오용과 한계는 주도적이거나 적극적인 몇몇 사람에 의해서 방향성이 정해지기 쉬우며, 또한 조작될 가능성 또한 높고, 의도적으로 조작, 왜곡하기 쉽기 때문에 어떠한 전문적 뒷받침이 없이는 제대로 된 기능을 갖추기 어렵다. 특히나 실물적 영역에서 그 실체가 잘 드러나는데, 수학이나 공학 등에서 보여주는 무지는 의외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집단지성 참여자의 다수가 잘못된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에는 오히려 참여자가 늘어나면서 점점 사실과 달라지는 일도 있다. 집단지성 참여자의 다수가 올바른 지식을 보유하고 있어도 어떠한 이유에 의해 오히려 보편적인 현상이나 사실에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원리와도 유사하다. 민주주의는 우수한 집단의 성숙한 의사결정이라면 효과적이지만, 저급한 집단에서는 다수결의 원리에 의해 눈앞에 이익만을 생각한 나머지 사회악을 정당화하는 집단지성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질 수도 있고, 몇몇 소수의 사람이 자신의 이익이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작된 집단지성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개연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최근 사이버상에 가짜뉴스가 범람하여 사회악으로 작용하는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사례들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사례와 천재나 현인이 역사를 이끌어 나가 나라를 구한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구성원 개개인의 지적 능력이 우수하면 그 집단의 능력과 전반적 성취 수준도 높아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지적인 성취물은 개인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 인류의 위대한 업적들은 개인보다는 집단의 힘으로 완성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식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를 말한다. 지성은 이러한 지식을 기초로 다양한 환경에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행위자의 능력을 말한다.

 

피에르 레비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없지만 누구나 무엇인가를 조금씩은 알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지식은 인류 전체에 퍼져 있다.”라고 전제하고, 전체로서의 결합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인간의 지적 능력이 완전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류가 지적 능력과 지적 자산을 서로 나누면서 함께 지성을 쌓아옴으로써 집단지성은 인간의 본래적 생존방식으로 인류의 역사는 집단지성의 역사라고 보았다. 집단지성은 수렵채집사회 이래 인간의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 형성의 기본원리로 작동해 왔다. 여러 차원의 집단 중에서 국가 단위를 상정한다면, 국가의 집단지성은 곧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들의 개별적인 판단과 행동들이 취합되어 국가의 의사결정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여 시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인류가 자신의 잠재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해 왔다. 그런데, 오늘날 컴퓨터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컴퓨터 공간 속의 가상세계는 실물세계의 한계를 비약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집단지성의 가능성이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다. 그는 ‘집단지성’을 “창조, 혁신, 발명 과정에 지적으로 협력을 할 수 있는 인간 공동체의 능력”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한 그는 집단지성을 ‘어디에나 분포하며 지속적으로 가치 부여되고 실시간으로 조정되며, 실제적 역량으로 동원되는 지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는 공동체 속에 개인을 종속시키는 전체주의와 집단지성을 분명히 구분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맹목적이고 자동적인 개미들의 공동행동은 집단지성으로 보지 않았다.

 

제임스 서로워키는 그의 저서 『대중의 지혜』를 통해 다양한 문제들이 주어졌을 경우 한 개인이 집단보다 일관되게 나은 결과를 지속적으로 내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문제해결 방안을 찾거나 혁신을 추진하거나 현명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때, 특히 미래를 예측할 때 소수의 엘리트보다 평범한 대중이 더 현명하다. 따라서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집단을 지배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찰스 리드비터는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저서를 통해 집단지성은 정보이용과 정보조직 방식을 변화시키고, 도서관과 사서, 신문사와 언론인, 음반사와 제작사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미 문화와 미디어, 소프트웨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분야는 선진국 경제 가운데 가장 빠르게 성장해 현재 국내총생산의 15퍼센트를 차지하는 분야이다. 

 

웹은 사람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형성하고 표현하고 공유하고 검토할 수 있는 자유를 확장한다. 따라서 집단지성은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평등, 자유에 유익할 것이다. 집단지성을 최대한 이용하는 경우에만 집단지성을 우리에게 유익하다. 집단지성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터넷, 웹, 소셜 미디어의 시대는 집단지성의 시대이다. 

 

집단지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집단지성은 사회의 감시를 증가시키고, 사생활의 영역을 축소하고, 사람들에게 순응을 강요하는 집단 압력을 증가시키고, 개성의 영역을 제한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사생활의 제한과 개성 위축은 자유의 확장을 의미한다. 이런 주장이 옳다면 웹과 집단지성은 자유와 관련해서 해악이 될 수 있겠지만, 웹의 네 가지 측면, 즉 첫째.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독자적으로 구상하고 표현할 수 있다. 둘째,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신이 원하는 개성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셋째, 소비자로서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살 수 있다. 넷째,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창조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등에서 자유의 제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컴퓨터가 생활의 필수적인 수단이 된 오늘날 웹은 생각하고 함께 행동할 것을 권유한다. 다만 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유지하는 범위에서 서로 공존하며 주체적인 자유의지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명한 삶이 될 것이다.  

 

 

[김관식]

시인

노산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김우종문학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이메일 : ​kks41900@naver.com

 

작성 2025.05.26 10:11 수정 2025.05.2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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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