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중용의 길

이태상

서울대 철학과 김상환의 ‘역동적 조화 중용에 저항시인의 진보 갈망 담다’의 글을 통해 김수영이 4.19 직후 발표한 ‘중용에 대하여’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중용을 풀이했다. 

 

여기에 있는 것은 중용이 아니다. 

답보다 죽은 평화다 나태다 무위다

 

“중용에는 일상적이라는 뜻도 있다. 이때 중​中은 안쪽을 의미한다. 중용의 논리는 진리를 평범한 일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찾지 말라 한다. 위대한 진리일수록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진부한 것을 숭고한 것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중용의 길이다. 이는 순간적인 것 속에 영원의 빛이 발하도록 만든다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중용을 시중​時中​이란 말로 옮겼다. 

 

이때 시중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진리는 시간 속에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초월적인 기준에 맞는다기보다 때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험적 진리는 없다. 동일한 판단은 항구적으로 옳거나 틀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때에 맞을 때, 다시 말해서 역사적 현실의 요구에 부응할 때만 참일 수 있다. 유가적 의미의 성스러움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자연 전체에까지 믿음을 심어주는 환경친화적인 창조의 경지다. 유가 철학이 환경 파괴와 더불어 자멸의 길을 가는 듯한 현대 문명에 던지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다. 유가적 주체를 대변하는 군자는 성스러움으로 가는 중용의 길 위에 있다. 중용은 그 여정을 성​誠​과 구별하여 성지라 했다. 하늘을 닮아 성스러워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중용이라는 것이다. 김수영의 많은 작품은 그런 중용의 몸부림을 노래한다. 1961년 발표한 ‘아픈 몸이’ 그 좋은 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이렇게 하늘을 닮아 성스러워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이 무한한 연습이 바로 윤동주의 ‘서시’가 기도하듯 부르는 노래가 아닌가. 최근 친구로부터 ‘미국 육사 역사 교과서에 기록된 한국인 영웅’이란 메일을 받고 처음엔 좀 의아해했다. 평소에 영웅이란 단어에 좀 거부감을 느껴오던 데다 한국인이 미국 역사 교과서에 기록되었다니. 그래도 읽어보니 절체절명의 고난을 이겨 낸 요셉 같은 기적의 인생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의 대단한 인물이었다. 6.25 당시 허기져 우물가에 쓰러져 있는 임종덕을 미 종군기자가 찍어 플브라이트 종군 기자상을 탄 그 거지 아이 이야기였다.

 

‘미국 육사 교과서에 기록된 한국인 영웅’

 

1949년 당시 12세의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 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고아가 된다.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에게 서울중학교 한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당시 서울중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 명의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을 우려해 임종덕에게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 가서 교실 옆 목조 건물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안에 있던 큰 나무에 올라가 나무속에 숨었다. 잠시 후 인민군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침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의 머리에 총검을 대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더니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잠시 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마당에 섰고 인민군은 당신네들은 반동분자이기 때문에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하며 형식적인 재판 후 바로 총살했다. 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접 목격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 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 때 미군을 만났다. 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리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부터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 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 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에 있는 희망원으로 들어가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어느 날 고아원 원장의 부정행위를 목격하고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쳐들어가 사무실을 박살 냈다. 주위 형들이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해서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 하면서 29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이들을 데리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게 되고 그 후로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고아들은 제대로 못 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기로 했다. 그 해가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를 해서 먹을 것과 약값을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부잣집들의 담을 넘었고 주로 서울 장충동을 활동 무대로 삼았다. 제니스 라디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어느 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좀 고급스러운 손님을 찾기 위해 대기하고 임종덕은 미국 공군 장성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고 차에서 내린 장군이 대기 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던 이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그러나 그는 멀리 못가고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임종덕은 과거 미군부대에 조금 있을 때 배운 서투른 영어로 자신이 절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임종덕을 유심히 지켜보던 장군은 절도죄로 연행되려는 임종덕을 자신의 숙소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하라고 지시했지만 임종덕은 자신이 없으면 100명의 고아들이 당장 굶어 죽는다고 사양했다. 장군은 사실여부를 확인하고는 그 고아들 전원을 미국 공군이 운영하던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임종덕은 하우스 보이로 일하게 된다. 그가 바로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중장이었다. 임종덕은 장군 덕분에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양아버지의 본격적인 신앙과 교육을 위한 원대한 계획’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 외 외국 고관들이 앉아 있었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는 임종덕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 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1953년 12월 화이트 중장은 북미주 항공사령관으로 발령받아 본국으로 귀환한다. 양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임종덕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임종덕은 하버드대학교에 무난히 입학하면서 그의 향학열은 더욱더 불타올랐다. 임종덕은 ‘앞으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테마를 주제로 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하버드대학교 학생 잡지에 실리게 되면서부터 이 논문은 미국의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임종덕의 논문에다 자기의 생각을 첨가해서 ‘중국이 앞으로 문화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썼는데 미국의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임종덕은 ‘2차 대전 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졸업 논문으로 하버드대학교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1967년 임종덕은 25살의 나이로 군 입대를 해서 4년간 장교 훈련을 받았는데, 특히 낙하산 훈련과 특공대 훈련에서 1등으로 수료했다. 그의 첫 부임지는 주일 대사관 무관이었다. 미국 정부는 임종덕을 아마 외교관으로 키울 계획이었지만 임종덕은 6개월 만에 월남전에 지원 특수부대로 갔다. 임종덕의 임무는 미군 포로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어느 날 임종덕 대위가 작전을 마치고 지프차로 귀대 중 매복 중인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숫자상으로 불리함을 판단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대신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

 

임종덕은 이 절박한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나 깨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에 매달렸다. 그리고 탈출의 계획을 세웠다. 월맹군 주둔 지역을 벗어난 임종덕은 드디어 밀림 속으로 숨어들었다. 매일 같이 큰 개구리를 잡아먹었으며 어떤 날은 4미터 이상 되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나무 위에 걸쳐 말리면서 1주일간 먹었다. 그 후 탈출에 성공했다가 다시 포로가 되고 또 탈출을 했다. 드디어 구출된 임종덕은 미군 헬리곱터에 타자마자 실신해 공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아들이 탈출해서 사이공에 왔다는 아들의 육성을 듣고 양부모는 기뻐서 울었다. 

 

임종덕은 존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백악관에서 ‘은성 무공 훈장’과 1계급 특진하게 된다. 그 후 대통령 안보비서관을 했으며 미국 중국, 핑퐁 외교로 극비합의 성공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소개로 결혼을 했고 노벨평화상 감이 된 탁구공으로 핑퐁외교를 했다. 이민 동포를 위한 LA 동양선교 교회 설립했으며 미국 대통령 3대에 걸친 안보비서관을 지냈다. 미군철수를 고집하는 카터 대통령과 결별하고 미국 육사의 교과서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된다. 

 

6.25 당시 밥을 얻어먹지 못하여 물배를 채우려고 종로구 내자동 우물가를 찾아가서 허기에 지쳐 힘없이 누워있던 임종덕 아이를 6·25 타임즈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이 유명한 풀브라이트 종군기 자상을 수상한 사진이 ‘우물가의 소년’이다. 임종덕 소령은 당시 영화 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당시 15만 불을 받았고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나온 과정을『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

 

이상과 같은 감동적인 내용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양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겠지만, 일종의 신앙 간증 같은 이 글은 한국전 당시 나 또한 미군의 ‘하우스보이’ 출신으로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포로가 된 임종덕을 지켜준 하나님이라던가,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는 등의 신앙고백이 본인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유익했었겠지만, 하나님이 어느 특정 개개인의 기도만 들어주시고 그 외 수많은 피해자와 희생자들을 못 본체 외면하셨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까닭에서다. 

 

인간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계에서 계속되고 있는 약육강식의 모든 제물들 말이다. 이라크전 당시 미국에선 차량마다 GOD BLESS AMERICA란 스티커가 붙었었다. 그 당시 난 속으로 반문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과 생물을 창조한 조물주라면 어찌 인간만, 미국만, 백인만, 남성만, 부자만 축복해주실 수 있을까? 기독교의 세 종파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신은 하나같이 인본주의, 그것도 배타적인 선민사상의 독선 독단적인 교리에 입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파괴와 분열만 조장하는 서양사상이 카오스를 초래한다면 상생과 조화의 동양사상은 본래의 코스모스를 꽃 피운다고 해야 하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5.06.14 10:30 수정 2025.06.1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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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