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곤한 정신으로도 아무 불편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물질로 보상받는 삶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 사람들 앞에 시를 들려줘도 어느 집 개가 짖나 하며 딴청 피우기 일쑤다. 그렇다. 나는 가끔 어느 집 개가 된다. 시 나부랭이를 읽느니 로또를 사겠노라고 대놓고 조롱할 땐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나도 로또나 살까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로또가 시보다 백번 좋은 건 맞는 말이다. 육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말이다. 근데 육신만으로 한평생 살 수 있을까.
정신이 조금 부족하면 진정한 위너다. 왜냐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 험한 세상 생각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건 진정한 행복이다. 생각해 보라, 개는 밥만 먹으면 만사 오케이다. 사자도 마찬가지다. 인간이라고 다를까. 인간도 배부르면 만사형통이다. 그러니까 생존은 밥이다. 밥은 모든 동물이 찬양해야 할 위대한 종교다. 근데 육신만 행복하면 그만일까. 정신도 배가 고프다. 불쌍한 정신은 배가 고파도 배고프다고 징징 짜지 않는다. 눈치 없는 우리는 정신까지 챙기지 못하고 산다. 특히 중년이 되면 그깟 정신이야 배고 고프든 말든 육신만 배부르면 땡이다.
너무 극단적이라고 나무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티비를 보면 안다. 배 채우는 먹방은 시청률 제조기고 뇌 채우는 다큐는 마니아들의 전유물이다. 그러니 콘텐츠 제작자들은 당연히 돈 되는 것을 만들어 낸다. 놀러 다니고 먹으러 다니고 죽어라 살 빼고 남 뒷담화하는 것에 이골이 난 프로들이 인기다. 이제 우리는 반성할 때가 되었다. 정신이 휴지처럼 쓰고 버려진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 인생의 길잡이를 대충 찾으면 나중에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다.
비루한 정신을 동정하지 말고 오직 순수해져야 한다. 남에게 내 책임을 떠넘기는 건 폭도나 마찬가지다. 인식의 상태를 열림으로 두고 내면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타고 정신의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한다. 위대해질 필요는 없지만 육체의 노예가 되진 말아야 한다. 시는 가장 순수한 물줄기다. 그 물줄기를 타고 정신까지 올라가면 너른 세상이 보일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고 사람들이 증명한다. 한 줄의 시를 탄생하기 위해 고뇌하고 사랑하고 실천한 시를 우리는 거저 가져와서 시의 열매를 먹으면 된다. 만해 한용운의 ‘당신을 보았습니다’를 읽으며 마음을 치유해 보자.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民籍)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만해처럼 우리에게도 그럴 때가 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술을 마실까, 망설이곤 한다. 그뿐이랴, 사랑을 할까, 이별을 할까, 망설이기도 하고 죽을까, 살까, 망설이기도 한다. 그렇게 망설이는 경계선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런데 그럴 때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면 망설임이 달라질까. 망설일 때는 암울할 때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다. 절망이 희망을 누르고 있을 때다. 만해가 노래한 것처럼, 그때 누군가 나를 봐주면 암울함이 사라지고 앞이 보이며 희망이 피어날 것이다.
만해가 남기고 간 시들은 한 시대가 지나간 후에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 대해 철학을 묻고 종교를 묻고 인문을 묻는다. 우리의 정신을 묻고 대답한다. 그거면 됐다. 시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에게 정신의 열매를 하나둘 맺게 해주고 있다. 만해가 가꾼 지혜의 숲에서 우리는 열린 열매를 보면서 정신의 풍요로움을 즐기면 된다. 좀 억지 같지만 정신먹방을 해도 좋으리라. 그 어렵던 시대를 꼿꼿하게 살아온 만해는 시라는 열매를 남기고 우리는 그 열매를 여전히 수확하고 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맞다. 나도 나를 위해 만해를 잊을 수가 없다. 나를 위해 시를 잊을 수가 없고 나를 위해 잊을 수가 없다. 순전히 나를 위해서 세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나는 나를 위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존재다. 그게 바로 당신이며 나이다. 나도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 당신을 보았다. 만해처럼.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