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한식디렉터 한식대가 장윤정 칼럼
어느 날 밥상에서 사라진 ‘박’ 이야기
예전에는 여름이면 박국 한 그릇이 밥상에 올라오는 게 당연했다. 가늘게 채 썬 박을 육수에 넣고 푹 끓인 박국은, 무겁지 않으면서도 속을 편안하게 해줬고, 된장이나 들깻 가루를 곁들여 계절의 깊은 맛을 살려주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맛이 낯설다. 박을 ‘먹는다’는 개념조차 생소해진 지금, 우리는 토종 음식에서 또 하나의 재료를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시장에서 박은 이제 거의 보기 힘들고, 장아찌나 나물로 먹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대체 왜 박은 우리 밥상에서 이렇게 조용히 사라져버린 걸까? 박은 왜 밥상에서 사라졌을까?
박은 호박이나 무처럼 과육이 많고 단맛이 강한 식 재료는 아니다. 오히려 수분이 많고 맛이 담백해 심심한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바로 그 심심함이 조선 시대에는 ‘속을 다스리는 음식,열을 내리는 여름철 보양식 으로 여겨졌다. 박은 자극적이지 않아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먹을 수 있었고, 특히 박 국은 더위에 지친 속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자연 식 해열제였다. 하지만 산업화와 함께 밥상은 빠르게 변화했다.
칼로리와 단맛이 강한 식 재료가 각광 받기 시작했고, 박 처럼 은은한 맛을 가진 식 재료는 외면 받기 시작했다. 또한 박 의 특성 상 보관과 유통이 까다로워졌고, 박을 활용한 음식들이 귀찮고 오래 걸리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으로 취급되면서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박국 , 박 나물, 박 장아찌.어머니의 손맛과 계절의 기억
박 국은 크게 맑은 국, 된장국, 들깨 국 세 가지로 나뉜다. 맑은 박국 은 채 썬 박 과 새우젓 혹은 멸치 육수로 담백하게 끓여내며, 된장 박국은 깊은 구수함을 더한다. 들깨를 갈아 넣은 박국은 진하고 고소해 영양 보강 식단으로도 손색 없다. 박 나물은 데친 박을 조물조물 무쳐 내는 찬 음식이다. 들기름, 간장, 마늘, 깨소금 만으로도 훌륭한 반찬이 되며, 입맛 없을 때 밥도둑이 따로 없다. 박 장아찌는 초여름 박을 얇게 썰어 말린 뒤, 간장과 식초, 고춧가루 양념에 숙성 시킨 저장 음식으로 예전 어머니들은 김치가 떨어질 때 꺼내 먹는 별미로 아꼈다. 최근 몇몇 슬로우 푸드 운동가들과 향토 음식 장인들이 박으로 밥상 되살리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전북 고창, 경북 안동, 충남 서천 등에서는 박을 활용한 향토 요리 경연대회가 열리며, 박을 식 재료로 삼는 로컬 푸드 식당도 조금씩 늘고 있다.
전통을 되살리는 박 음식의 현대적 변주
박은 수분 함량이 90% 이상으로 낮은 칼로리 식 재료다. 100g당 열량은 20kcal 미만으로, 다이어트 식단이나 건강식으로 안성맞춤이다. 또한 박 속에는 이눌린, 칼륨, 식이섬유가 풍부해 혈압 조절, 이뇨 작용, 장 기능 개선에도 도움을 준다. 특히 박을 활용한 국물 요리는 소화가 잘되고, 포만감이 높아 위가 약한 노년층이나 어린이에게도 안전한 건강식이다.
2023년 농촌진흥청 자료에 따르면, 박국을 2주간 섭취한 실험군은 위내 가스와 복부 팽만감이 평균 25% 감소했고, 체내 염분 농도도 안정화 된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엔 박을 활용한 레시피도 현대적으로 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박을 채 썰어 냉채로 만든 박 냉채 샐러드 박을 구워낸 박 스테이크 박과 닭가슴 살을 넣은 저염 고단백 박죽 이처럼 박은 조리법만 조금 바꾸면 현대 식단에서도 충분히 활용 가능한 ‘실속 있는 건강 식 재료다.
잊혀진 박 음식, 다시 불러내야 할 시간
우리는 왜 전통 음식을 잊어가는 걸까? 속도와 자극에 익숙해진 밥상에서, 박 처럼 조용한 재료는 설 자리를 잃어간다. 그러나 전통 음식은 단순히 ‘옛날 방식’이 아니라, 자연과 공존하며 삶을 풍요롭게 했던 방식이다. 박을 다시 밥상 위로 불러내는 일은 단순한 요리 재현이 아니다. 그건 맛의 기억을 복원하고, 가족의 식탁을 되살리는 일이다. 느림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 사라질 때,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 걸까? 이제는 ‘심심한 맛’이 아니라 깊은 맛을 되찾아야 할 때다. 박국 한 그릇의 따뜻함이, 우리가 잃어버린 밥상의 품격을 다시 일깨워줄지도 모른다.
시원한 맑은 박국
재료: 박 1/2개 (얇게 채 썰기)
멸치 다시마 육수 2컵
새우젓 1작은술
다진 마늘 1/2작은술
대파 약간
만드는 법: 멸치 다시마로 기본 육수를 먼저 낸다.
채 썬 박을 넣고 10분 정도 끓인다.
새우젓, 마늘, 대파 넣고 간을 맞추면 끝!
들기름 박나물 무침
재료: 박 1/3개 (채 썰기)
소금 약간
들기름 1큰술
간장 1작은술
다진 마늘, 깨소금
만드는 법: 채 썬 박에 소금 약간 넣고 5분 절인다.
물기 살짝 짠 후, 들기름, 간장, 마늘, 깨소금 넣고 무치면 완성.취향에 따라 다진 청양고추
부드러운 박죽
재료: 박 1컵 (작게 깍둑 썰기)
불린 쌀 1/3컵
물 3컵
소금 약간
만드는 법: 쌀과 박을 냄비에 넣고 물을 부어 끓인다.
중약 불로 15분 저어가며 끓인다.
마지막에 소금 약간 넣고 간 맞추면 완성.
위에 부담 없는 아침식으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