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금 줄 돈이 없대요. 새 집 계약도 했는데 어쩌죠?”
경기도 용인시의 한 전셋집에 살고 있는 직장인 박모 씨(38세)는 전세계약 만기를 한 달 앞두고 혼란에 빠졌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돈이 없다며 이사 날짜를 미뤄달라고 한 것이다. 새로 계약한 집으로 이사도 못 가고, 이중계약 위약금까지 떠안게 생겼다.
이처럼 전세보증금 반환 문제로 세입자와 집주인 간 갈등이 커지고 있다. 원인은 정부의 ‘전세퇴거자금대출’ 제한 방침이다. 지난 6월 27일 발표된 ‘가계부채 관리 강화 방안’에 따라, 수도권과 규제지역에서는 유주택자의 대출 한도가 1억 원으로 축소됐고, 다주택자의 경우 대출이 전면 금지됐다.

해당 대출은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반환하기 위해 사용하는 금융상품이다. 전세 기간이 끝나고 기존 세입자가 나가며 새 세입자를 받기 전 공백기에 주로 활용된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인해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집주인들이 급증했고, 세입자는 보증금 반환이 지연되거나 무산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문제는 대출 자체가 막힌 것이 아니라, 대출 승인 요건이 ‘임대인의 자력 반환 불가 상황’으로 한정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자력 여부’ 판단이 모호해, 현장에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은행은 이를 근거로 대출 심사를 보류하거나 거절하고 있어, 일선 창구에선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 난감하다는 반응이다.
이에 대해 수원대학교 부동산학전공 노승철 교수는 “전세퇴거자금대출의 목적은 세입자 보호에 있다. 그런데 이번 정책은 집주인의 자금력을 기준으로 판단하다 보니, 세입자는 반환을 보장받지 못한 채 법적 사각지대에 놓이고 있다”며 “기준이 애매한 상황에서 제도 설계 자체의 허점이 드러났다. 특히 정책 도입 시점과 임대차 계약 시점 간 혼선이 있어 혼란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사례에서도 정책 부작용이 드러난다. 서울 강동구의 한 전셋집 세입자는 집주인이 대출을 받지 못하자 보증금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소송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이사 일정도 맞출 수 없어 결국 신용대출로 전세금을 충당해야 했다. 또 다른 세입자는 보증금을 받기 위해 은행, 법원, 중개사무소를 수차례 오가며 생업에 차질을 빚었다.
노 교수는 “이미 계약을 체결한 세입자 입장에서는 돌발 변수가 생긴 셈”이라며 “계약 이행이 어려워질 경우 세입자의 피해는 고스란히 일상으로 이어진다. 정부가 시장 전반의 흐름과 현실을 고려한 세밀한 정책 설계와 함께, 세입자를 위한 금융 안전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이 상황이 ‘전세의 월세화’를 더욱 가속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보증금 반환이 어려워진 집주인들이 월세로 전환하거나, 신규 전세 계약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동산 플랫폼 통계에 따르면 7월 첫째 주 기준 수도권 전세 신규 계약 건수는 전월 대비 18% 감소했고, 반면 월세 비중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부는 대출 규제에 따른 부작용에 대해 “시장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현장의 불만은 커져만 가고 있다. 특히 정책 시행 이전에 계약을 체결한 임대차 당사자들조차 제도 적용을 받으면서 형평성 논란도 제기된다.
전세퇴거자금대출의 제한 조치로 세입자의 보증금 반환이 지연되거나 무산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특히 모호한 대출 승인 기준이 세입자의 주거 불안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수원대학교 노승철 교수는 “정책의 목적이 세입자 보호에 있음을 감안할 때, 현행 규정은 제도적 허점이 크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보다 명확한 기준 정비와 피해 방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