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채기가 있는
파란 눈의 여인이
고혹적인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는 순간
동토의 허허벌판에 새겨진
시베리아의 푸른 눈동자 바이칼
바이칼 앞에는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가장 깊고
가장 푸르고
가장 차갑고
가장 담수량이 많고
가장 오래된 호수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호수 가는 길은
초원의 자유방임형 소 떼가 반겨주고
광활한 타이가(taiga) 숲을 헤치고 달리면
분홍바늘꽃 야생화가 초원에 가득하다

길가에 선 자작나무들은
′본향(本鄕)을 찾아 잘왔노라′
나지막이 속삭여주어
바이칼로 가는 길은 외롭지 않다
바지선을 타고 알혼섬으로 건너가
러시아 군용 짚차 푸르공을 타고
먼지를 일으키며 신나게 달린다
구릉길을 달리는 푸르공은 놀이공원 청룡열차

후지르 마을의 부르한 바위는
지구상에서 영기(靈氣)가 가장 센 곳이자
최남선 선생이 북방 민족인 우리의 시원(始元)이라 했던 곳
가는 길이 험하지만
고운 님 만나려면
힘들고 더디게 찾아가야
그리움이 깊어지는 법
영기 서린 부르한 바위는
세상 샤먼의 성지
몽골, 티벳, 탕구트족 발원지이자
징기스칸이 묻힌 곳이라 추앙받는 곳
부르한 바위로 내려가
호수에 발을 담그니
그동안 잊고 살았던
북방 민족의 DNA가 되살아난다

내 영혼의 자궁이자 피정지를 찾아와
달빛 실은 바이칼의 파도를 노래했던
백석과 춘원의 흔적을 따라
찾아온 바이칼
장엄한 해가 바이칼의 수평선을 물들이는 시간
출렁이는 바이칼 물결도 잠잠해지니
억겁의 시간이 멈춘 듯 천지가 고요하다

수십 년 동안
막연한 동경과 가슴속 깊이 간직했던 본향은
이제 바이칼의 신비스러운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바이칼호수: 2,500만 년 나이를 먹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남한의 1/3 크기다. 남북 636km, 둘레 2,200km, 최고수심 1,742m, 지구 담수의 20%를 지니고 있다. 호수 안에 있는 알혼섬은 제주도 절반 크기로, 섬 안에 세계 샤먼의 성지 부르한 바위가 있다. 바이칼에 가장 가까운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가는 교통편은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우리나라에서 러시아로 가는 직항로가 모두 폐쇄되어 있어 몽골 수도 울란바트르역에서 출발하는 러시아 이르쿠츠크행 침대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은데, 출입국 검사까지 포함해서 이르쿠츠크까지 대략 24시간 정도 걸린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