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서 칼럼] 공공성은 추상적 정의가 아니다

이순신의 선공후사와 공공성의 재정의

지금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공정의 문제는 단순히 신자유주의의 폐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 뿌리는 훨씬 깊고 오래되었다. 그리고 이미 극단까지 치달은 능력주의와 그것의 문제점을 은폐· 정당화하는 이중 규범이 지금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능력주의는 본래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노력에 합당한 보상을 주기 위한 원리였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변질되었다. 경쟁에서 뒤쳐진 이들에게 “네가 부족해서”라는 낙인을 찍는 순간 공동체의 책임은 모두 사라진다. 공정은 더 이상 함께 지켜내야 할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내가 흘린 땀의 대가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으로 축소된다.

 

한국인의 분노가 언제나 ‘공정’이라는 말과 맞닿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입시 비리, 채용 특혜, 부동산 불평등이 드러날 때마다 전국민적 공분을 사는 이유가 단순히 불법적 요소 때문만이겠는가. 이런 분노는 대개 보편적 정의에 기초하기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공(公)’이 끊임없이 정치적 수사로 호출되지만 실제로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사적 네트워크와 특권의 장치이다. 최근 사면된 조국 사태의 본질 역시 현행법 위반 여부가 아닌, 지식과 권력을 통한 ‘인텔리즘’적 독점이 드러낸 우리사회의 치부였다.

 

이 지점에서 이순신의 '남솔(濫率)'은 우리가 잊고 있는 공공성의 원형을 일깨워준다. 조선시대에는 관리가 타지에 부임할 때 가족과 식솔을 과도하게 데려가는 것을 금지했다. 남솔은 공적 책임을 훼손하는 ‘사적 허물’로 규정되었지만, 이순신은 아비 잃은 두 형의 자식들까지 대동해서 정읍현감 부임 길에 올랐다. 파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카들을 돌보는 책임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공공성을 추상적 규율이나 대의명분이 아닌, 눈앞의 타자를 포기하지 않는 구체적 책임임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례이다. 이순신에게 있어 선공후사(先公後私) 역시 국가라는 추상적 권위 앞에서 개인을 희생하는 영웅적 구호가 아니라 오히려 사적 부담을 공적 책임의 일부로 수용하는 윤리적 결단이었을 것이다.

 

공공성은 제도 이전의 문화이자, 정치 이전의 윤리다. 이순신의 남솔이 보여주듯 공공성은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눈앞의 타자를 포기하지 않는, 인격에 기반한 구체적 책임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서구적 공익(public interest) 담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고유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강력한 가족주의와 집단주의가 동시에 작동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사’를 위해서는 불법조차도 감수하면서, 정작 공동체 전체의 ‘공’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태도가 반복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공공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한 제도 개혁이나 추상적 가치 선포를 넘어서는 과제이다. 그것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공동체 전체를 품되, 동시에 개인의 권리와 자율성을 지켜내는 제3의 합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 합의는 법률과 제도의 강제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작은 배려와 생활 속 습관, 불합리한 관행을 거부하는 용기가 공동체성으로 응결될 때 비로소 사회적 합의로 승화될 것이다.

 

불평등의 시대를 넘어서는 길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공공성은 멀리 있는 대의명분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매일 반복되는 책임의 문화로부터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임의 문화가 사회적 합의로 확장될 때, 한국 사회는 비로소 우리만의 특수한 조건을 품는 새로운 공공성의 길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lsblyb@naver.com

 

작성 2025.08.28 10:28 수정 2025.08.2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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