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조선 수군은 4차례에 걸쳐 출전을 하였다. 1592년 5월 29일(음력)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은 두번째 출전을 개시하였는데, 이 시기 경상도 사천 해안에서 왜선을 만나 승리를 거둔 전투가 사천해전이다. 사천해전은 특히 임진왜란 시기 거북선이 처음으로 출전한 전투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전투 경과는 충무공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전쟁 보고서인 장계 「당포파왜병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노산 이은상은 『이충무공전서』를 번역하면서 사천해전이 벌어진 장소를 지금의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라고 서술하였다. 「당포파왜병장」에는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의 지명이 ‘사천 선창(泗川船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은상은 ‘선창’을 ‘전선소(戰船所)’ 또는 ‘선소(船所)’의 의미로 해석하여 조선 후기에 사천 선소가 있던 선진리(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를 사천 선창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현재 그의 주장은 학계 안팎에서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당포파왜병장」에 기록된 당시 전투 상황, 사천 지역의 지명, 조선시대 용어 ‘선창’의 의미 등을 살펴보면 이은상의 주장은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우선 「당포파왜병장」에 기록된 사천해전 전투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군은 5월 29일 판옥선 23척을 이끌고 제2차 출전을 개시하였다. 전라좌수군은 곧바로 노량(경남 남해군 설천면과 하동군 금남면 사이 해협)에 도착하여 전선 3척을 가진 경상우수군과 합류하였다. 이틀 전인 5월 27일 경상우수사가 공문을 보내어 일본군 함대가 사천과 곤양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므로 전라좌수군이 노량에 도착한 5월 29일에는 일본군 함대는 이미 사천과 곤양 사이에 있는 사천만 일대를 횡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전라좌수군이 경상우수군과 합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왜선 1척이 곤양에서 나와 사천을 향해 기슭을 따라가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조선 수군의 선봉 장수들이 이를 쫓아가자 왜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으므로 남은 배만 불태웠다.
조선 수군이 왜선을 불태운 뒤 사천 선창을 바라보니 일본군 400여 명이 산이 7∼8리쯤(약 3km) 구불구불 이어진 험준한 곳에 진을 치고 있었고, 누각처럼 큰 왜선 12척이 그 해안 아래에 줄을 지어 정박해 있었다. 일본군이 높은 곳에 주둔하여 지세가 불리할 뿐만 아니라 썰물 때이기도 하므로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같은 큰 배가 해안으로 쉽게 돌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 수군이 일본군을 바다로 유인하여 싸우려고 배를 돌려 1리(약 400m) 가까이 물러 나오자, 일본군 200여 명이 진을 친 곳에서 내려와 반은 왜선을 지키고 나머지 반은 해안 아래에서 총을 쏘았다. 마침 밀물이 들어와 배가 해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자, 조선 수군은 먼저 거북선을 들여보내 산 위와 해안 아래와 왜선 정박처 3곳을 지키는 일본군에게 천자·지자·현자·황자 등의 총통을 쏘았다. 일본군은 맞서 대항하였으나 조선 수군이 일제히 돌진하며 총통과 화살로 공격하자, 일본군은 많은 자들이 중상을 입고 높은 산으로 물러나 더 이상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위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이를 하나씩 살펴보자.
(1) 조선 수군이 발견한 왜선 12척은 선진리보다 더 북쪽에 있었다.
「당포파왜병장」에 따르면 조선 수군 선봉 장수들은 곤양에서 나와 사천을 향해 기슭을 따라가던 왜선 1척을 추격하여 불태웠다. 조선시대 곤양 읍치는 지금의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에 있었으며, 사천 읍치는 지금의 사천시 사천읍에 있었다. 즉, 그 왜선 1척은 곤양읍성에서 나오는 물길인 광포만 방향으로부터 사천만으로 나와 사천읍성이 있는 방향인 북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다음 지도는 조선 수군 선봉이 왜선 1척을 추격한 상황을 사천만 일대 지도에 묘사한 것이다.

위 지도를 살펴보면, 광포만이 사천만과 만나는 곳으로부터 북쪽에 있는 어느 기슭에서 조선 수군 선봉이 왜선 1척을 붙잡아 불태웠음을 알 수 있다. 광포만과 사천만이 만나는 곳은 조선 후기에 사천 선소가 있던 선진리 선진 마을과 직선 거리로 대략 2.5km 떨어져 있다. 조선 수군 선봉이 광포만과 사천만이 만나는 곳에 이르면 선진 마을 일대는 육안으로 쉽게 관측이 가능하다. 여러 인터넷 지도에서 제공하는 로드뷰/거리뷰 등을 이용해서도 금방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사천해전 당시 사천 선창에는 누각처럼 큰 왜선이 12척이나 정박해 있었다. 만일 사천 선창이 사천 선소가 있던 선진 마을이었다면, 조선 수군 선봉은 왜선 1척을 추격하다가 사천 선창에 정박한 왜선 함대 12척을 발견하고는 조선 수군 함대를 모두 동원하여 먼저 왜선 함대 12척부터 공격했을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왜선 함대 12척을 놓아두고 추격하던 왜선 1척부터 그대로 따라가서 불태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즉, 조선 수군 선봉 장수들이 왜선 12척을 발견한 곳은 선진리 선진 마을(조선 후기 사천 선소) 보다 더 북쪽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2)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과 선진리 선진 마을은 지리적 특징이 다르다.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당포파왜병장」은 사천해전이 벌어진 사천 선창의 모습을 ‘산이 7∼8리쯤 구불구불하게 이어졌다(⼀⼭逶迤七⼋⾥許).’라고 묘사하였다. 이는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의 지리적 특징을 밝혀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이은상이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이라고 주장한 선진리 선진 마을의 지형이 「당포파왜병장」의 묘사와 일치하는지 살펴보자. 다음 지도는 선진리 선진 마을 일대 지형을 보여주는 지도이다.

선진리 선진 마을은 조선 후기에 사천 선소가 있던 곳이다. 선진 마을 옆에는 독립 구릉이 인접해 있는데, 그 위에는 정유재란 시기 일본군이 쌓은 왜성인 사천 선진리성이 있다. 선진리성이 위치한 독립 구릉의 고도는 주변에 비해 높고, 독립 구릉 외곽은 평지에 가까운 완만한 지역이다. 일본군이 이곳에 선진리성을 쌓은 이유도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위 지도에서 붉은 선으로 표시한 부분이 독립 구릉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그 둘레는 약 1km 정도이다. 이 붉은 선과 ‘1km’ 표시는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맵에서 제공하는 거리 측정 메뉴로 측정한 것이다. 붉은 선 안쪽에 선진리성이 위치한 모습이 보인다. 독립 구릉 둘레 1km는 약 3리 거리이며, 해안에서 바라보면 독립 구릉 너비는 약 0.4km(약 1리)에 불과하다. 이는 「당포파왜병장」에 기록된 ‘산이 7∼8리쯤 구불구불하게 이어졌다(⼀⼭逶迤七⼋⾥許).’라는 묘사와 차이가 크다.
다음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사천 선진리성을 찍은 사진이다. 사진 오른편 윗부분에 사천 선진리성이 있는 독립 구릉이 보이며, 사진 하단에는 조선 후기 선소 터로 보이는 포구가 있다.

「당포파왜병장」은 사천해전이 벌어진 곳에 대해 ‘썰물 때에는 조선 수군의 판옥선 같은 큰 배가 해안으로 쉽게 돌진할 수 없다,’라는 의미로 그 지역의 지리적 특징을 기록하였다. 또한 밀물이 들어오고 나서야 배(판옥선)가 해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즉, 사천 선창 해안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썰물 때 판옥선이 들어가지 못할 만큼 수심이 낮아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선진리 선진 마을은 일제강점기에 100∼200톤 내외 소형 기선의 기항지로 이용될 정도로 해안 수심이 그리 낮지 않은 곳이다. 1912년 선진 마을에 선진항이 개척되어 부산과 목포 등을 다니는 정기선이 기항하였고, 경남 서부지역으로 들어오는 일본인들이 주로 선진항을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1912∼1915년 남해안·서해안·동해안 항로는 연안의 110여 개 항구가 기항지로 지정되었는데, 선진항 또한 그 항로에 포함되어 100∼200톤 내외의 소형 기선이 오가는 기항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경하중량이 140톤 또는 151톤에 이르며(『판옥선 학술 복원보고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21), 배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서 흘수(배가 물에 잠겨 있는 부분의 깊이)가 낮은 선박이다. 어떤 연구 자료(박근홍, 「판옥선 선형의 비밀코드 ‘元高’의 조선학적 고찰」, 『해양유산』 6, 2024, 국립해양박물관)에 따르면 판옥선의 흘수는 빈 배 기준으로 1.7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선진항을 기항하던 100∼200톤 소형 기선과 임진왜란 시기 판옥선을 직접 비교해볼 방법은 없다. 하지만 두 배가 중량이 비슷하고 판옥선이 평저선인 점을 감안하면 판옥선의 흘수가 소형 기선의 흘수 보다 낮았을 것이다.
현재 선진리 선진 마을 해안가는 일부 지역이 매립 및 개발되어 그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 해안에서 바다 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금방 수심이 깊어지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은 화약 병기인 화포를 이용하여 일본군 함대와 함포전을 벌였다. 해안가 수심이 낮은 지역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면, 해안가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도 조선 수군이 함포를 쏘아 정박한 왜선을 공격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선진리 선진 마을 해안가 조수 간만의 차가 판옥선 출입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임을 고려하면, 선진리 선진 마을은 사천 선창으로 볼 수 없다.
(3) 『난중일기』에 기록된 ‘사천 선창’의 위치는 사천만 최북단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당포파왜병장」뿐만 아니라 『난중일기』에서도 ‘사천 선창(泗川船滄)’을 언급하였다.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 전후 상황을 살펴보면 사천 선창의 위치가 대략 드러난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4년 8월 16일
새벽에 출발하여 소비포에 이르러 배를 정박하였다. 아침 식사를 한 뒤에 돛을 펴고 사천 선창(泗川船滄)에 이르니 기직남(사천현감)과 곤양군수(이광악)가 왔다. 그대로 숙박하였다.
『난중일기』, 1594년 8월 17일
원수(권율)가 오시(11∼1시)에 사천에 이르러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청하기에 곤양군수(이광악)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무는 사천현감(기직남)의 거처로 갔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도원수 권율은 통제사 이순신과 1594년 8월 17일 사천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통제사 이순신은 8월 15일 한산도에서 배를 출발하여 8월 16일에 사천 선창에 이르러 숙박하고, 이튿날 8월 17일 사천현감 거처로 가서 권율을 만났다.
위 『난중일기』의 1594년 8월 17일 기록에 나타난 사천현감 거처는 사천읍성에 있었다. 조선시대 고을 수령이 거처하던 건물 내아(內衙)는 동헌 등과 함께 고을의 관아를 구성하던 주요한 건물이었다. 현재 사천읍성은 일부 성곽이 사천시 사천읍 산성공원 일대에 남아 있으며 경상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시기 한산도에서 배를 타고 바닷길을 따라 사천읍성으로 간다면, 사천만 최북단까지 배로 이동한 다음 그곳에서 육로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편리한 경로이다.

위 지도는 1918년경 작성된 지도로서 사천만 북단 지역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지도에 나타난 지형은 근대·현대에 진행된 사천공항 개항이나 간척사업 이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만약 『난중일기』에 언급된 사천 선창이 사천 선소(지금의 선진리 선진 마을)였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위 지도의 ‘사천 선소’로 표시한 곳에 배를 정박한 다음 말을 타고 육지 길을 통해 ‘사천읍성’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이는 정황으로 보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배를 사천 선소가 아닌 사천만 최북단 쪽에 정박하면, 사천읍성으로 가는 육지 길이 훨씬 가깝고 그 길도 대부분 평지이므로 이동하기가 훨씬 편리해지기 때문이다. 굳이 사천 선소에 배를 정박하여 훨씬 먼 육지 길로 힘들게 이동할 이유가 없다.
사천 선소가 있던 선진리 선진 마을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배를 정박할 수 있는 포구로서 신장포(지금의 사천시 사남면 방지리)와 조동(지금의 사천시 사남면 월성리 조동 마을)도 있었다. 특히 조동은 조선 후기 제민창(濟民倉)이 설치되어 곡식을 나르던 배가 드나들던 곳이다. 배를 신장포나 조동에 정박하더라도 사천읍성까지 가는 육지 길이 더 가까워진다. 사천 선소에 배를 댈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위 『난중일기』의 기록은 ‘사천 선창’이 지금의 선진리 선진 마을과 다른 곳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4) 「당포파왜병장」에 기록된 ‘사천 선창’은 ‘사천 선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사용되던 용어 ‘선창’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역사학계에서는 종종 ‘선창’과 ‘선소(또는 전선소)’를 같은 의미로 다루지만,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최근 조선시대 용어 ‘선소’와 ‘선창’의 용례를 집중적으로 다룬 논문(정현창·김병인, 「조선시대 ‘선소’와 ‘선창’의 용례와 개념」, 『지방사와 지방문화』 20-1, 2017, 역사문화학회)이 출간되어 이들 용어의 표기와 의미가 상세히 밝혀졌다. 이 논문에 다르면 조선시대 ‘선창’은 ‘정박처’, ‘선착장’, ‘부두’, ‘창고’, ‘배다리(舟橋)’, ‘선실(船室)’, ‘선소(船所)’, ‘전선소(戰船所)’, ‘굴강’ 등 상당히 다양한 의미가 있었다.
이은상이 ‘사천 선창 = 사천 선소’라고 주장했던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충무공 이순신은 용어 ‘선창’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을까? ‘선창’은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에 17차례, 『난중일기』에 9차례 등장한다. ‘선창’이 등장하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 대략적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들이 발견된다.
「견내량파왜병장」
안골포(安骨浦)에 이르러 선창(船滄)을 바라보니 왜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이 와서 정박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방이 있는 3층 대선 1척과 2층 대선 2척이 포구에서 밖을 향해 정박해 있었으며 그 나머지 배는 물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정박해 있었습니다.
「진왜정장」
제포 선창(薺浦船滄)은 대선·중선이 무수히 줄지어 정박해 있었고, 그 밖에도 본토(일본)에서 나오거나 가덕·웅천·거제로 향하는 배가 연이어 끊이지 않았습니다.
「견내량파왜병장」은 1592년에 벌어진 한산도대첩과 안골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보고한 장계이며, 「진왜정장」은 1593년 8월경 경상도 해안 지역에 정박한 일본군 상황을 보고한 장계이다. 두 장계의 내용을 살펴보면, 많은 규모의 왜선이 정박한 장소를 ‘선창’으로 서술하였다. 이들 내용에 나타난 ‘선창’은 배가 정박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인 ‘부두’나 ‘선착장’의 의미에 가깝다.
위 장계에 나타난 용어 ‘선창’을 ‘선소(또는 전선소)’로 해석하면 해당 문장의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소(또는 전선소)’에서 배가 정박하는 장소를 보통 굴강(掘江)으로 부르는데, 굴강에 정박할 수 있는 배의 규모는 대부분 최대 5~6척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많은 굴강 유적이 남아 있으므로 이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즉, 「당포파왜병장」에 언급된 ‘사천 선창’은 ‘사천 부두’나 ‘사천 선착장’의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사천 선창’은 ‘사천 선소’가 아니라 사천읍치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부두나 선착장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천 선창이 사천읍치와 가까이 있었다는 말은, 사천 선창이 사천만 최북단 근처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필자는 ‘사천 선창’과 비슷한 사례인 ‘진해 선창(鎭海船滄)’이 ‘진해 선소’가 아니라 진해 읍치 바로 앞 바다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 논문(「제2차 당항포해전지의 위치 고찰」, 『동방학지』 210, 2025,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을 발표한 적이 있다. ‘진해 선창’은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당항포파왜병장」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난중일기』에 선소를 의미하는 용어인 ‘전선소(戰船所)’와 ‘선소(船所)’가 등장하는 사실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충무공 이순신이 용어 ‘전선소’·‘선소’를 ‘선창’과 혼용한 것이 아니라면, ‘사천 선창’은 ‘사천 선소’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난중일기』에서 ‘전선소’와 ‘선소’가 등장하는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22일
아침에 업무를 본 뒤에 녹도로 갔다. 황숙도가 함께 갔다. 먼저 흥양(지금의 전남 고흥군)의 전선소(戰船所)에 들려서 직접 배와 온갖 물품들을 점검한 다음 녹도로 갔다.
『난중일기』, 1596년 8월 29일
일찍 출발하여 사천에 이르러 아침 식사를 한 뒤에 이어 선소(船所)로 갔다.
(5) 선진리 선소는 임진왜란 시기에도 같은 곳에 있었다는 것을 보장하지 못한다.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선진 마을은 조선 후기 사천 선소가 있던 곳이다. 선진 마을은 조선 후기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선진리’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선진리 선소가 기록된 가장 빠른 사료는 1699년 편찬된 『사천현여지승람』이다. 이 책은 1985년에 『속간사천현여지승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출간되기도 하였다. 1699년은 임진왜란으로부터 약 100년이 흐른 시기이다. 시기상 100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니, 임진왜란 때에도 선진리 선소가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조선 후기 경상도 지역 선소 관련 사료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임진왜란 시기 사천은 경상도 지역 조선 수군에 소속된 군현(郡縣)이었다. 다음 표는 사천과 함께 경상도 지역 조선 수군에 소속되었던 하동·울산·고성·곤양 군현의 선소 위치가 변경되었던 기록을 보여준다.

위 표에 따르면 하동·울산·고성·곤양 선소는 조선 후기 여러 차례 위치가 변경되었다. 즉, 조선시대 선소는 그 위치가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제든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었다.
특히 하동 선소와 울산 선소의 기록을 살펴보자. 두 선소는 1624년에 처음 설치된 것처럼 기록되었다. 하지만 하동과 울산은 임진왜란 시기 경상도 조선 수군(경상우수군, 경상좌수군)에 속했던 군현이므로 임진왜란 이전에도 선소가 존재했다. 다시 말하자면, 1624년에 설치된 하동 선소와 울산 선소는 임진왜란 이전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변경되어 새로 설치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0년대 조선은 수군의 방어체제를 새로 정비하였다. 경상도 여러 진보의 위치를 변경하였으며, 수군진과 군현에 속한 군선의 배치 방식도 정비하였다. 또한 하삼도(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는 1606년에 총 62척이었던 판옥선을 1639년에는 120척까지 그 규모를 늘렸다. 하동 선소와 울산 선소가 1624년에 위치를 변경한 것도 이러한 방어체제 정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선진리 선소 또한 임진왜란이 끝난 1600년대에 새로 정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1699년 『사천현여지승람』이 편찬되기 이전에 다른 곳으로부터 선진리로 위치가 변경되어 설치되었을 수 있다. 이은상은 ‘사천 선창 = 사천 선소’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애당초 선진리 선소는 임진왜란 시기에 같은 곳에 있었다는 것조차 증명되지 못한다.
- 본 칼럼은 역사문화학회에서 출간된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8권 1호(2025년)에 수록된 논문 「임진왜란 시기 사천해전지의 위치 고찰」의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한 글이다. 이 논문은 역사문화학회 홈페이지(hiscu.or.kr) 또는 한국학술지인용색인 사이트(kci.go.kr)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https://myisoonsinxsz.zaemi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