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악의 폭염이 한반도를 덮친 올 여름, 영영 올 것 같지 않던 가을이 다가왔다. 서늘한 바람과 뜨거운 햇살이 교차하는 초가을날, 남산 자락에 들어서니 숲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서로를 탐하며 춤을 춘다. 숲에 부는 바람에도 색깔이 있다면 9월의 바람은 진초록이 아닐까. 잿빛 도시를 푸르름으로 물들이는 남산 산책로에는 코스모스와 개망초가 인사를 건넨다. 이제 여름을 떠나보내고 이 찬란한 계절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다.

‘남산’하면 N서울타워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남산의 하이라이트는 둘레길 산책이다. 북측 순환로와 남측 숲길을 이은 총 7.5km 길을 따라 서울의 거대한 허파가 숨 쉰다. 들숨과 날숨 사이 푸르름은 절정에 올랐다. 숲이 우거진 남산 둘레길은 더위를 식히기에도 제격이다. 산바람이 솔솔 불어와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준다. 벤치에 앉아 눈을 잠시 감으면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마치 명상음악을 틀어 놓은 듯 편안하게 다가온다.

남산 북측 순환로 와룡묘 옆에 N서울타워로 올라가는 북측 숲길이 새로 열렸는데, 계단이 낮은 편한 산책로를 따라 20분만 오르면 남산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 전망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유난히 높고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아래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감상하면서 다가온 가을을 즐기고 있다. N서울타워 주변은 요즘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영화 ‘케데헌’의 인증 샷을 남기려는 외국인들로 가득하다.

둘레길을 걷다가 점심시간에 맞추어 남산의 옛 이름을 딴 한식당 ‘목멱산방’에 들린다. 남산의 옛 이름인 목멱산(木覓山)에서 이름을 따온 ‘목멱산방’은 2017, 2018, 2019 3년 연속 미쉐린가이드 서울에 이름을 올리며 남산에 가면 꼭 가봐야 할 곳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전통 한옥 분위기에서 즐기는 비빔밥은 놋그릇에 정갈하게 담겨 제공되는 대표메뉴 중의 하나다. 재료 하나하나 유기농 식자재를 고집해 조리하는데 비빔밥 한 그릇에 세프의 정성이 가득 담겨있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이다. ‘남산골샌님’이란 말이 있다. 가난하면서도 자존심만 센 선비를 이르는 말이다. 엄격한 신분 질서가 있던 조선시대에는 같은 양반이어도 정치·경제 중심지인 북촌에 사는 양반의 지위가 높았다. 남산 기슭 남촌에는 주로 하급 관리나 벼슬에 오르지 못한 가난한 선비가 모여 살았는데 이들은 축재(蓄財)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로지 청렴과 지조를 지키며 살았다.

한옥마을에 있는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관훈동 민씨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옥인동 윤씨 가옥 등 조선시대 한옥 다섯 채를 차례로 둘러본다. 민씨 가옥 고즈넉한 대청마루에 앉아 새콤달콤한 오미자차를 즐기고 있는데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담을 넘어온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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