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흥렬 칼럼]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가

곽흥렬

무릎에 탈이 났다. 조금만 과하게 걸었다 싶으면 여지없이 슬관절이 붓고 통증이 찾아온다.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자꾸만 시큰거리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가 않다. 몇 차례 온찜질을 하고 나서 쉬어 주면 조금 누그러진다. 그러다가 다시 무리가 가면 도지고, 도지고를 반복한다. 아마도 고질이 되지나 않았는가 싶어 적이 걱정스럽다. 통증을 다스리려 무릎을 주무르고 있자니 이십여 년 전의 기억 하나가 생각을 붙잡는다. 

 

당시 직장 동료 가운데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던 K 선생이 있었다. 그는 산타기에 시쳇말로 완전히 필이 꽂힌 등산 마니아였다. 그의 모든 관심사의 촉수는 온통 산으로 뻗어 있었다. 생래적으로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평소 조용조용 지내다가도, 산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소리만 나오면 엔도르핀이 솟구치는지 목청이 높아진다. 그러다 보니 대화의 소재도 노상 산 이야기 일색이었다. 이를테면 시쳇말로 ‘산생산사山生山死’였다고나 할까.

 

그랬던 K 선생이 어느 봄날 동료들에게 등산만큼 좋은 취미생활이 없다면서 자기를 따라 함께 산행을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 왔다. 처음엔 누구 죽일 일 있느냐며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따라 어설프게 산행에 나섰다가는 초등학생이 대학생을 쫓아가야 할 만큼 단단히 혼쭐이 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두 번의 시도로 끝내고 말 위인이 아니었다. 그의 산행 예찬론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레코드판처럼 되풀이되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거듭되는 구슬림에 바람도 쐴 겸 한번 응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는 쪽으로 차츰 마음들이 옮겨 갔다.

 

처음부터 너무 높은 산을 오르는 건 무리일 수 있다는 그의 조언에,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를 택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낙점된 곳이 앞산이었다. 

 

K 선생이 앞장을 서고 나머지는 뒤를 따랐다. 그는 출발한 뒤 장장 서너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다. 게다가 걸음걸이마저 산길임에도 평지를 걷는 것처럼이나 빨랐다. 나름대로는 신경을 써 준다는 것이 그 정도였다. 쫓아가야 하는 우리는 하나같이 숨이 턱에 걸려 연신 헉헉거렸다.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직장 동료 등산 행사는 주위에서 명산으로 알려져 있는 비슬산으로, 팔공산으로, 가야산으로 몇 차례 더 이어졌다. 그 서너 번의 등행 만에 우리는 그만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생각 없이 계속 감행하는 것은 어설픈 체력으론 도저히 무리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후로 모임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깜냥은 미치지 못하면서 의욕만 앞세운다고 하여 될 일이 아니었다. 세상사에는 분수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 분수를 헤아리지 못했으니 낭패를 당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한때 허영심으로 인해 자신의 재산이나 소득 수준에 맞지 않는 사치를 일삼는 여성을 비하하는 ‘된장녀’란 말이 유행했었다. 그녀들은 보통 식사 한 끼가 넘는 가격의 커피를 즐기며, 명품을 소비하는 것을 품위 유지로 여긴다. 집은 없어도 고급차부터 사고 보는 축들도 그와 비슷한 심리를 지닌 경우가 아닌가 한다. 물론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자포자기적인 심정에서 그러는 면이 전혀 없다 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분수를 모르는 소비는 내일을 기약 못 하는 하루살이 같은 삶에 지나지 않지 아니하는가.

 

몇 해 전에는 ‘욜로족’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영어 문장 ‘You Only Live Once’의 머리글자를 딴 ‘욜로YOLO’에다 그런 무리라는 뜻을 지닌 접미사인 ‘∼족’을 붙여서 만들어낸 용어인 모양이다.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이니 현재를 즐기면서 살자”, 이런 주의 주장을 지닌 부류라는 의미로 풀이가 된다.

 

지난날엔 저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흔히들 ‘티끌 모아 태산’을 들먹였다. 다들 한푼 두푼 아끼고 모아서 마침내 하나의 큰 목표를 이루어 내는 고진감래의 삶을 미덕으로 여기며 칭송했다. 

 

세상의 가치 기준이 달라지면서 영원한 진리일 것 같았던 그 속담도 요즈음에 와선 ‘티끌 모아 쓰레기’로 버전이 바뀌었다. 희망을 잃어버린 나날, 터널 속에 갇힌 듯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두고 하는 냉소적인 표현일 터이다. 오늘의 세태를 참으로 기막히게 풍자한 말이라는 생각에 무릎이 쳐진다.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물가에다 도저히 가 닿을 수 없어 보이는 내 집 마련 문제 같은 일들로 사람살이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내일의 희망을 설계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해서 빚어지는 영혼의 빈곤 탓일 것도 같다. 소소한 일상에 쫓기며 생활이라는 파고를 헤쳐나가야 하는 고달픈 처지에 놓인 서민들에게는 무척이나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백번 양보하여,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달라졌다고는 해도, 그래도 어디까지나 황새는 황새답고 뱁새는 뱁새다워야 하는 것이 보다 가치있는 삶의 자세가 아닐는지…….

 

인생살이, 영원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이 지난至難한 과제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 온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김규련수필문학상

이메일 kwak-pogok@hanmail.net

 

작성 2025.09.16 08:54 수정 2025.09.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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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