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필의 인문학 여행] 불가리아의 고구려 유적

역사추적

불가리아 카잔루크의 장미축제

 

해마다 5월이며 불가리아 옛 수도 카잔루크에서 장미축제가 벌어진다. 세계적인 축제로 이름나 있었다. 카잔루크 시가엔 화려한 장미꽃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미녀들이 꽃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인다. 관광객들의 시선은 온통 붉은 장미차를 타고 가는 미녀들 행렬에 집중된다. 퍼레이드 선두엔 꽃 갑옷으로 무장한 여장부가 말을 타고 큰 칼을 높이 들고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행보를 하고 있었다. 카잔루크는 불가르와 대적하였던 동로마 제국의 변방 요새였다. 

 

불가리아는 동유럽 흑해 연안의 빈한한 장수 국가로 장미와 요구르트 가공식품을 주산하는 나라이다. 가난하고 낙후한 생활을 하지만, 서양의 어떤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높은 행복지수와 독특한 동서양 혼성 문화와 전통의 고풍 의식을 고수하는 신비로운 나라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아라비아의 이슬람 문화와 몽고와 흉노의 동양 문화가 혼합하여 나라 전체가 고대문화의 종합 박물관이었다. 아레나데 세르디카 호텔의 박물관은 로마를 지하에 숨기고 있다는 로마유물과 고대 동서양 유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중에 고구려 문화유적들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허윤 기자는 고구려가 유럽에 진출했다는 흔적을 찾으려고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르강과 헝가리, 불가리의 다뉴브강의 흑해 연안을 더듬고 다녔다. 불가리아는 고구려 의용 기병대가 대제국 로마를 뒤흔들었던 곳이다. 훈제국의 아틸라가 영웅으로 활개 치던 배후엔 고구려 기병대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다뉴브강을 낀 헝가리와 흑해 연안의 불가리아엔 고구려 유물과 전통이 다처에 산재해 있어서 고구려가 이곳까지 진출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로마사를 살펴보면 훈제국은 동양에서 온 흉노의 후예이며 고구려 기병대가 아틸라의 기병대였다는 기록도 엿볼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불령지(不逞支) 기병대가 헝가리에서 아틸라의 훈제국을 세운 것은 익히 알려진 것이지만 연개소문의 막리지(莫離支) 기병대가 불가리에서 훈국을 부활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불가리아의 훈의 후손인 아스파루후는 훈제국을 다시 일으키려고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은 막리지 기병대를 불가리아에 파병하여 제1불가리 공국을 세우고 수도 플리스카에 성곽을 쌓고 훈국의 불가리아를 부활시켰다.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성엔 고구려인이 살았다는 유적이 남아 있었다. 

 

소피아의 아사달성은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을 따서 부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불가리아 제2의 도시인 풀 로브디프와 옛 수도였던 베릴코 트르노보에서도 고구려 유물과 유적을 볼 수 있었다. 경이롭게도 불가리아의 가옥 구조가 한국의 가옥과 너무 흡사하다. 마을의 돌담길과 석축 담이 그렇고 마당과 툇마루가 비슷했다. 

 

소피아 여인상

 

불가리아 남부 그리스 국경 인근의 릴라는 2,500m 산상 호수 도시인데 한국적인 마을의 전원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수명이 긴 노인들이 사는 장수 마을이기도 하다. 이들의 장수 비결은 이곳에서 나는 요구르트 유제품을 즐겨 먹으며 중세 수도사 같은 삶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잔루크는 온 산야와 거리가 장미꽃과 향으로 가득하다. 이곳 장미는 온실이나 장미 농장이 아닌 산상 평원에 야생화처럼 집단으로 핀 것이다. 이곳에서 해마다 장미축제가 펼쳐진다. 예쁜 천사 같은 아가씨들이 장미꽃을 몸에 두르고 꽃차를 타고 폐레이드를 벌이는 모습은 천상의 환생 같았다. 꽃차는 맨 앞에선 개선장군처럼 늠름한 여전사가 이끌고 있었다. 꽃차 행렬이 멈추고 장미의 여전사들은 인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허윤 기자는 커피를 사 들고 선두의 여전사 앞으로 다가섰다.

 

“장미축제에서 여전사 복장이 이채롭습니다. 전사 복장은 무슨 뜻이 있나요?” 

 

그녀는 밝은 미소로 말했다.

 

“전설의 카잔루크 여전사입니다. 전 여전사를 이끄는 소피아 여왕 역입니다.” 

“소피아 여왕! 어떤 인물입니까?”

“불가리아를 지키려고 로마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여왕입니다.”

“그럼 소피아광장의 여인상과 연관이 있나요?”

“네 맞습니다. 그 동상이 소피아 여왕 동상입니다.”

 

소피아 광장엔 우뚝 선 여인상이 있다. 소피아 여인상엔 동명의 두 소피아 전설이 전하는데 한 분은 로마의 공주이고 한 분은 불가리아 여왕이다.

 

“저는 한국의 유럽 특파원으로 파견된 허윤 기자입니다. 

“장미축제를 취재하려고 오셨군요. 저는 킴 오데사라고 합니다. 소피아 대학에서 동양사 강의를 하고 있어요.” 

“네, 반갑습니다. 교수님이군요. 두 소피아 동상 이야길 듣고 싶습니다.”

“먼저 로마군과 싸우다가 죽었던 불가리아 여왕이 맞습니다.”

 

카잔루크의 장미축제는 로마 비잔틴군과 싸워 죽은 불가리아 여전사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축제였다. 화려한 장미꽃 축제엔 슬픈 역사가 숨겨있었다. 카잔르크는 로마 비잔틴군과 싸우다가 죽은 불가리아 여전사들의 피로 물든 언덕이었다. 장미꽃은 이곳에서 죽은 여전사들의 영혼이 피워낸 꽃이었다. 후세인들은 이곳의 장미꽃을 ‘피의 영혼’이라고 불렀다. 소피아 여인상은 전쟁에서 죽은 소피아 여왕의 상징인 동상이었다. 

 

그녀는 원정 온 고구려 장수 고영과 결혼한 여왕이었다. 아스파루후왕이 죽고 고영 장군은 여동생인 소피아 공주를 여왕으로 앉히고 결혼을 하였다. 동로마 비잔틴군이 신생 불가리를 공격하였다. 고구려 막리지 기병대장 고영 장군이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슬픔을 견디다 못한 소피아 여왕은 스스로 무장하고 1,000여 명의 여전사를 이끌고 전투에 나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여왕은 전사하고 불가르 여전사들은 비잔틴군의 포로가 되었다. 잔인한 비잔틴 병사들은 여전사들의 입안에 칼을 넣고 물었다. 

 

‘항복하면 살려줄 것이나 거부하면 찌를 것이다. 예스, 노로 답하라.’ 

 

여전사들은 입에 칼을 물고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 고통을 감내하였다. 비잔틴 병사들은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자 에스, 항복한 것으로 알고 모두 풀어주었다. 그런데 여전사들이 고개를 상하로 끄덕인 것은 항복이 아니고 저항이라는 의미였다. 뒤늦게 안 비잔틴 병사들은 여전사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그 수가 장장 천여 명이 넘었다. 비운의 역사였다. 불가리아 제2공국은 그녀들의 혼을 기리기 위하여 카잔르크의 산에 장미를 심었다. 장미촌이 형성되었고 장미축제는 그들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이었다.

 

다음 날 오데사와 만나기로 한 소피아 성으로 갔을 때 그녀는 붉은 장미 무늬의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그 모습이 마치 소피아 여신상 같았다. 높은 첨탑 위에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으로 두 손 벌려 먼 하늘을 바라보며 자유를 갈구하는 소피아 여신상의 당당한 모습이었다. 나라를 구하다가 죽은 소피아 여왕은 동상은 불가리아의 상징적인 문장(紋章)이었다. 

 

우린 고성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스키 샐러드와 쉬슬길 양고기 꼬치 안주에 불가리아 전통 주인 ‘라키아’를 마셨다. 훌쩍 몇 모금 마셨더니 목에서 불이 났다. 60도가 넘는 술이었다. 그녀는 소피아 공주의 이야길 하였다.

 

동로마 비잔틴의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불가르를 속국으로 만들고 지배하면서 경치 좋고 공기 맑은 소피아 성에 신병을 앓고 있던  딸 소피아 공주를 치료차 휴양시켰다. 휴양 중에 공주의 병이 낫게 되어 병을 치료한 기념으로 소피아 공주 상을 세웠다. 2차대전 후 불가리아 정부는 소피아 공주 상을 철거하고 장미 여전사 소피아 여왕상으로 바꾸어 버렸다. 

 

오데사 교수는 세르디카 호텔의 지하 유적과 불가리아 여러 곳에서 산재한 훈의 역사를 증명하는 유적에서 고구려 문화유적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고구려가 발칸반도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불가리아의 고구려 유물

 

‘고구려가 유럽에 진출하였다. 불가리아의 소피아 성은 고조선의 아사달성과 흡사하다. 주변에 고조선식 무덤인 고인돌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불가리아 사학자들이 무려 1,200여 개의 고조선식 고인돌을 발견하였다. 고인돌은 석기시대 무덤인데 이곳의 고인돌은 고구려 철기시대의 고인돌로 추정되었다. 출입문이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잘 다듬은 돌로 보아서 고조선의 고인돌 양식인데 이 무덤의 주인공은 고구려의 귀족 무덤이라는 것이다. ’ - 신채호 선생의 학설 

 

플리스카(소피아) 성곽은 고구려 아사달의 성곽과 흡사하게 2중으로 되어 있는데 내성은 아사달 궁성이고 외성은 긴 장방형 토성이다. 성 밖 주위를 둘러 환호를 파서 사람과 말이 건널 수 없게 하였다. 아사달 내성엔 보야(부여)왕족과 귀족들이 살았고 외성 아사달엔 백성들과 병사들이 살았다. 외성 밖에는  동로마 속주 트라키아 원주민과 다수의 슬라브족이 거주하였다. 소피아 여왕은 한때 발칸반도의 맹주가 되었다. 

 

불가리아는 태양신을 숭배하였다. 태양신 숭배는 단군 신앙의 제천의식인데 그 제단이 불가리아 도처에 남아 있었다. 불가리아는 출산과 양육에 단군의 부인 어마이(Omay)를 받들었다. 자손의 번식을 기원하는 어마이는 삼신(잉태. 출산. 육아) 할머니라고 불렀다. 불가리아는 발칸산(白頭山)을 명산으로 제천 행사를 하였던 곳인데 발칸산을 백두산을 의미한다. 발칸이란 명칭은 백두산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허윤 기자는 훈족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고구려 기병대가 훈제국 건국의 조력자라는 것을 알아냈다. 로마 기병대와 고구려 기병대(훈기병대)가 맞붙어 싸우면 고구려 개마무사 기병대가 이긴다는 신채호 선생님의 주장을 믿는 것이었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
이메일 :danmoon@hanmail.net

 

작성 2025.09.20 10:20 수정 2025.09.2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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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