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추방론’을 주장한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동굴의 안과 밖의 세계를 구별했다. 그가 얘기한 불변하는 사물의 본질인 이데아의 세계는 동굴의 밖이고 이와 반대되는 가짜의 세계가 바로 현실 세계인 동굴 안이라 한다. 그러면서 독사(doxa)를 얘기한다. 독사(doxa) 즉 억견(臆見)은 일반적으로 근거가 부족한, 수준 낮은 자기만의 의견이고, 반면에 이성에 의해 참을 파악하는 참된 인식을 그는 에피스테메라 했다. 그래서 가시계의 잘못된 인식의 동굴 안은 독사이고 반면 이성으로 인식하는 동굴 밖은 참된 인식, 또는 에피스테메[epistēmē]라 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플라톤의 이러한 인식 세계를 부정한다. 불변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시대마다 에피스테메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말과 사물」에서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여 그 질서 방식이 시대별로 어떠한 인식 기반 위에서 확립됐는가를 분석하고자 했다. 따라서 특정 시대마다 존재하는 지배적인 인식의 무의식 체계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사물 간 질서를 부여하고 무의식 인식의 기초이자 지식이 구성되는 공간을 에피스테메라 했다.
한마디로 특정 시대에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무의식적인 인식 체계가 있어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식 지평과 구조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개고기 금지법이 생겨 사육, 도살 유통 등등을 금지하고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전문 음식점이 있었고, 즐겨 먹는 사람도 많았다. 이렇듯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시대의 사물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옳고 그름이 아닌 판단의 과정이 다르다는 것이 에피스테메이다.
예를 들어 유교 사회인 조선시대에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말이 있다. 일곱 가지의 이유를 들어 아내를 내 내쫓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시대에 대한 인식 지평이었고 사회의 한 단면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칠거지악’을 얘기한다면 과연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상상에 맡기지 않아도 짐작이 가고 남는다.
조선시대의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아니 악마와 같은 인식의 저변에 자리하고 있는 사고의 체계를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푸코가 얘기했듯이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이념과 사유의 방식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물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인식은 그 시대의 가장 보편적 인식에 밑바탕을 두는 에피스테메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판단과 인식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예술작품이나 예술가들 또한 특정한 시대나 문화에서 공유되는 그 시대의 지식과 사유의 방식 등은 에피스테메에 따라 새로운 표현 기법과 해석을 시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시대에 무의식적으로 투영된 기본적인 지식인 에피스테메가 던지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하나의 현상과 사물을 보고도 느끼는 감정이나 인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쉽게 보고 실제로 겪고 있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에피스테메가 다른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특히, AI 등 인터넷과 디지털기기에 익숙한 디지털네이티브 세대와 그렇지 못한 부모의 세대 사이에서 알 수 있고 또한, 취업, 결혼, 출산, 등등에서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 또한 에피스테메가 다르다는 것이다.
에피스테메의 개념은 지식의 범위와 인식의 방식을 규정하고, 시대별로 변화하는 역사적 구조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사성, 즉 호두와 뇌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사물의 질서를 이해했고, 고전주의 시대에는 동일성과 차이를 정확히 구분하는 분류 체계가 중심이었다. 근대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과 생명 언어 등의 실체를 분석하는 사고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으로 미셸 푸코는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현대 사회는 에피스테메를 통한 지식의 절대성보다는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며 ‘돈’이 새로운 에피스테메로 작용할 수 있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 같은 맥락으로 우리가 겪는 세대 차이 등에서 오는 시대정신과 인식의 지평을 뜻하는 것이 에피스테메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린, 어떠한 에피스테메를 지향하고 있을까?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