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한국 최초의 신학자 남궁혁 박사는 순교했다. 지금 한국교회 목사들이나 평신도들은. 남궁혁 박사를 알리 없다. 남궁혁 박사는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이고,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쟁쟁한 선교사 교수들과 함께 신약학을 가르쳤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은 라부열 박사였는데, 그는 깐깐하고 저돌적이었다. 남궁혁 박사는 평양신학교 잡지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장과 성경 번역에 몰두했다. 그의 외조부가 평양 감사를 지냈기에 그는 유복하게 <평양 감영>에서 자랐고, 양반이었다. 가정이 넉넉했던 터라 도량이 넓고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신사였다.
남궁혁 박사는 1882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6세에 배재학당에 입학해서, 헐버트(Ho-
mer Hulbert) 등으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입문했다. 그는 애국자로서 <협성회>에 가입해 가두 연설을 하기도 했었다. 1901년에는 대한제국 해관에 입사했다. 첫 직장은 인천해관이었고, 후에 목포 해관으로 전보되어 그곳에서 선교사들과 교인들을 만나면서 목회자의 소명을 받았다. 남궁혁은 그 당시 남 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세관에서 근무하던 세리 마태를 부르듯이, 남궁혁은 세관에서 봉사하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영흥학교(현 영흥 중·고등학교 전신)의 야간부 영어 교사를 무보수로 봉사했다.
1908년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친언니 김함라를 만나 결혼해 광주로 갔다. 그리고 광주 숭일중학교에 1916년까지 교사로 지내다가 <평양신학교>로 가서 공부한 후,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식민 통치를 반대하는 조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로부터 집중 감시를 받게 된다. 그 후 남궁혁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Princ-
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를 하고,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교에서 박사(Ph.D) 학위를 받고, 평양신학교 한국인 최초의 교수가 되어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1929년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박사의 결혼 주례를 했고, 산정현 교회 동사 목사로서 위임식 설교도 했었다. 남궁혁 박사는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박형룡 박사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그리고 미국 선교사 교수들의 강의록 번역을 거의 남궁혁이 하다시피 했고, 신학지남(神學指南) 잡지는 박형룡과 김재준에게 맡겼다. 이때부터 박형룡과 김재준 사이는 서로가 신학적으로 다투고 있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노골화되자, 남궁혁 박사는 온몸으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결국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아들이 <상록회 사건>으로 조사받게 되자, 온 가족이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거류민 단장>을 맡았다. 여기서 한가지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이승만이 한성 감옥에서 6년 가까이 고통을 이겨내고 출옥하자, 남궁혁은 자기 집에서 이승만이 몸을 추스르고 보양하도록 도왔다. 그 시절은 남궁혁은 외조부가 평양감사를 지냈던 터라 형편이 넉넉한 데다 배재학당의 동창인 이승만을 도왔고, 이승만을 미국으로 가도록 했다.
남궁혁 박사의 친구로는 <함태영> <이자익> <채필근> 등 세 분의 친구가 있었고, 후배로는 <박형룡> <송창근> <김재준> 등이 있었다. 그리고 1932년에 남궁혁은 21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이 되기도 했었다. 해방 후인 1946년에는 피난민들을 인솔하고 귀국하여 군정 당국의 간절한 청원으로 신생 한국의 재무부 세관 국장으로 취임해서 일을 했고, 1948년에는 대한기독교 연합회 총무의 일을 하였다. 그러나 남궁혁 박사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당의 불법 남침으로 대한민국은 처참하게 무너졌고, 모든 것이 쑥대밭으로 변했다. 1950년 8월 23일 장로라고 자처하는 박(朴)모의 손에 잡혀 납북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납북된 송창근 박사는, 변절자 김창준의 권유를 듣다가, ‘이 역적 놈아! 물러가라!’고 호령하다 죽었다고 한다. 물론 남궁혁 박사도 같이 순교했다고 한다.
한때 평양 감사의 손주로서 평양신학교의 최초의 교수인 신학박사이고, 정통 신학 잡지 <신학지남(神學指南)>을 편집하던 남궁혁 박사가 평양에 가서 공산당에게 순교 당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은 껍데기만 대한민국이고, 실제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한 걸음 두 걸음 나가고 있는데, 위대하신 신학자들, 위대하신 목회자들은 아직도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남궁혁 박사가 우리 신학의 거성이자 최초의 한국인 교수였지만, 공산당에게 끌려가서 순교했던 <역사적 사실>을 공유하고 싶다.
기회 지나가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기 전에, 모두 한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앞날을 예견 못 한다. 요즘 신학교도 많고 훌륭한 교수들이 넘치고도 넘친다. 그리고 모두가 복음적이고 개혁주의자로 부르짖는 서구 학문의 유통업자들이 되어있다. 이렇게도 나라가 기울어져 가고 있는데도 신학자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있다.
공산당은 맨 먼저 신학자들을 처형한다. 교회를 무너뜨린다. 즉 신학을 무너뜨리고, 신앙을 무너뜨린다. 아직도 이 늙은이의 주장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면 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