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이로 칼럼] 표현의 시대에 침묵한다는 것

임이로

앞에는 촛불이 놓여있다. 향초는 그렇게 굳은 심지를 애태우며 살아있는 불씨를 지키고 있다.

그 작은 불꽃에 감응하며 불멍을 때리다가, 열기에 녹아내리는 촛농이 가는 길을 바라봤다. 끝없이 연소하는 대가로 치러지는 촛농은 촛불이 단단히 서있는 모양새를 더 단단하게 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곳에서 문득 우리네가 살아가는 모양새가 보였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말하고, 표현하는 것을 미덕이라 배운다. 그것은 저 작은 불씨를 닮았다.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빛내고 증명하며, 끊임없이 사람들과 소통하며 말과 말을 나눈다. 소셜미디어가 발달하며 실시간으로 내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지금, 작은 휴대폰 속 어플 하나를 켜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불씨처럼 태우고 있다. 

 

눈앞의 심지는 계속 연소하며 촛농은 흘러내리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존재의 불씨를 보며, 동시에 흐르고 있을 촛농 같은 그들의 설움을 생각해 본다. 

 

예로부터 사주명식에는 ‘불(火)’이라는 것은 남에게 드러내는 표현역과 말솜씨에 연관이 깊다. 영화 엘리멘탈(2023)의 ‘기쁨이’는 항상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며 스스로 귀여운 빛을 낸다. 우리도 우리 내면이 가진 불빛을 그렇게 표현하는 일을 반복한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 세상은 불바다일지도. 과히 강박적이다.

 

그런데 그들은 알까. 자신들이 녹여놓은 촛농이 결국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발을 묶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변덕스러운 존재라. ‘나는 이런 사람이야’를 손쉽게 드러내놓고는, 언젠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기 십상이다. 디지털 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기에, 우리가 쉽게 드러낸 많은 것들은 되려 족쇄가 되기도 한다. 사실, 디지털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려면 증명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호적과 가족관계, 신분과 범죄 이력 등등.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너무도 쉽게 정의해 버린다. 굳어진 내 발밑의 촛농처럼.

 

문득 창밖에 뜬 별을 바라본다.

저 별은 촛농 같은 흔적도 없이 빛난다, 별똥별로 추락할지언정. 저 별도 언젠가는 우주 먼지가 되어 흩어지겠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그 소멸을 영원히 지켜볼 수는 없다. 그전에 우리가 저 별처럼 흩어질 테니.

 

그래서 나는 오늘도 침묵한다. 끊임없이 시끄럽게 불타는 세상에서. 뜨겁게 떨어진 촛농이 나를 함부로 발목 잡는 게 싫어서. “침묵은 다른 방식의 자기주장”이라는 체 게바라의 말처럼. 그는 말보다 행동으로 세상을 뒤집으려 했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이 우리가 스스로를 태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라면, 나는 침묵하여 빛나고 싶다. 저 별처럼.

 

수십 광년을 지나 이제서야 지구에 도달한 저 별빛은 매한가지로, 인류의 역사가 소멸하는 동안 영원히 도착할 테니. 오늘도 내 우주는 조용하다.

 

 

[임이로]

시인

칼럼니스트

제5회 코스미안상 수상

시집 <오늘도 꽃은 피어라> 

메일: bkksg.studio@gmail.com

임이로의 비껴서기 bkksg.com

 

작성 2025.09.26 12:14 수정 2025.09.2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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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