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이천백여 년 전 인간 ‘시저’다. 여름이 익어가던 칠월, 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 사이에서 두 명의 누이를 둔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집정관까지는 오르지 못한 평범한 원로원 의원으로 일찍 돌아갔지만,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의 지혜롭고 강인한 성품은 나의 성장과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어머니의 보호와 정치적 인맥을 맺으며 잘 버텨낼 수 있었다. 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학, 수사학, 법률 등을 배우며 귀족 자제로서 철저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내가 청년이 되자 로마에는 술라 독재정권이 들어섰다. 술라의 정적이며 나의 장인인 킨나와 고모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이끄는 민중파를 지지하면서 술라 독재정권의 살생부에 올랐다. 그러자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가 이혼을 요구했지만 나는 이를 거부했다. 그로 인해 재산을 몰수당하고 목숨까지 위협받았지만, 친척들의 중재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나는 술라 정권을 피해 소아시아로 건너가 군복무를 했다. 이때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의 궁정에 파견된 경험이 있었고, 또한 적과의 전투에서 용맹을 인정받아 시민관 훈장을 받았다.
그러다가 술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이 시기의 경험 덕분에 일찍부터 정치의 냉혹함과 권력 투쟁의 본질을 체감했다. 권력은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정치적 야심을 키워나갔다. 첫 번째 아내 코르넬라가 죽은 후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와 결혼을 하면서 술라파의 지지까지 얻어 나는 승승장구하며 로마의 권력을 하나하나 섭렵해 나갔다. 나는 로마의 최고위직인 집정관에 오를 것을 희망했지만, 나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원로원은 내가 집정관이 되는 것을 방해하였다.
나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성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원로원의 방해를 이기고 집정관에 당선되어 1차 삼두정치의 시대를 열어나갔다. 나는 국유지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민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 집정관에 오른 또 한 명의 집정관 비불루스를 무력화시키고 퇴역한 군인과 민중들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하나하나 실현해 나갔다. 나의 독주는 공화정을 지지하는 귀족들에게 위협이 되어 평생 갈등이 나를 따라다녔다.
“경험은 모든 것의 스승이다.”
나와 함께 삼두정치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가 전쟁 중에 전사하고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나의 외동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나와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3명이 이끌던 삼두정치가 붕괴할 조짐을 보이자, 로마 귀족들이 먼저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혼인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끊어지자, 폼페이우스를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나와 결별하고 귀족 세력과 손을 잡았다. 원로원의 귀족들은 나에게 즉시 군대를 해산하고 갈리아 총독에서 물러나 홀로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나에게 무장해제하고 죽으러 오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몇 차례 귀족들과 협상하려고 했지만, 귀족들은 폼페이우스의 군사력을 믿고 나의 협상요구를 무시했다. 이 와중에 내 편을 들고 있던 안토니우스가 내가 있는 갈리아로 도망쳐왔다. 나는 이미 협상은 깨졌다는 걸 직감하고 내전을 벌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갈리아에서 훈련된 최정예 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 갔다. 나는 갈리아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루비콘강을 건너며 나의 병사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가 최정예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 가자, 귀족들과 폼페이우스는 당황한 나머지 로마를 두고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그들은 나보다 몇 배나 많은 군대를 가졌으면서 맞서지도 못하고 정신적으로 이미 패배했다.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그리스와 히스파니아에서 나의 군대에게 크게 패하고 폼페이우스는 훗날을 도모하고자 이집트로 도망쳐 갔다. 나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건너갔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도망 중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나는 이집트에서 운명의 여인 클레오파트라를 만났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을 다투던 이집트 여왕으로 나는 한눈에 그녀에게 끌려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 사랑의 결실인 아들이 태어났다.
로마의 모든 정적이 사라지고 귀족권이 약해지자 나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천하가 내 손안에 들어왔다. 집정관 자리에 안토니우스를 앉히고 나는 그 위의 종신 독재관 자리를 차지하였다. 집정관은 명목일 뿐 로마의 정치는 이제 나의 손에서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았지만, 나는 황제가 되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월 15일 운명의 날 원로원 회의장 앞에서 나는 누군가가 휘두른 칼에 23곳의 상처를 입고 폼페이우스의 동상 앞에 쓰러졌다. 그리고 서서히 죽어갔다. 내 나이 56세였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
이메일 jmh1016@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