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버트’ 풍자만화가이자 설득화법 전문 저술가 스콧 애덤스는 진작부터 앞을 내다봤다. “도널드 트럼프는 설득력에 있어 지구상 최고다. 이런 독보적인 능력이 있기에 그는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될 것이며, 11월 본선에서도 기록적인 압승을 거둬 백악관에 입성할 것이다.” 스콧 애덤스의 명언 한두 마디 음미해보자.
“창조성이란 자신에게 실수를 허용하는 거다. 그 실수 가운데 어떤 걸 챙길 것인지를 아는 게 예술이다.”
“엔지니어들은 문제 풀기를 좋아한다. 주변에 풀 문제가 없으면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들을 만들어 낸다.”
1990년대 스콧 애덤스가 주창한 ‘딜버트 원칙’란 것이 있다. 회사들은 직원 중에서 가장 유능치 못한 사람들을 경영진에 승진시키는데 그들이 회사에 끼칠 수 있는 손해를 제한하기 위해서이란다.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반풍수가 집안 망치고 선무당이 사람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2016년 4월 28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칼럼 ‘동서교차로’에서 이기희 윈드화랑 대표 겸 작가는 다음과 같이 ‘고수와 반풍수’를 정의한다.
“명풍수가 되기 위해선 산공부에 10년, 혈을 깨우치는데 30년 정도의 수련을 거쳐야 법안이 열리게 된다. 풍수는 범안凡眼-법안法眼-도안道眼-신안神顔의 경지를 거쳐야 고수가 된다. 대자연의 오묘함에 대하여 겸손하게 묵상해 볼 수 있는 혜안이 열린 사람이 풍수지리의 고수가 된다. 패혈이나 과맥처-수맥처-풍기처-음기처, 풍수의 이치나 산의 배합을 안다 해도 사람의 도리를 알지 못하면 반풍수에 불과하다. 예술가란 이름을 하루 세끼 밥공기로 저울질하는 자는 허공에 헛발길질하는 선무당에 불과하다. 인생의 고수 자리는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한계를 극복한 사람, 경계를 넘은 자, 목숨 바쳐 한길을 파고든 사람들을 전문가 혹은 고수라 부른다. 스스로 이름 붙이지 않고 타인에 의해 타인을 위한 타인을 위해 혼신을 바쳐 정진한 사람, 멀리 보고 바로 보는 지혜를 습득한 사람들이 진정한 고수고 달인이다.”
자, 이제 우리 이태진 시인의 ‘뒤에 서는 아이’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여기에 백인덕 시인이 토를 단 것을 생각해 보자.
줄을 서면 늘 뒤에 서는 아이가 있었다.
앞에 서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아서인지
뒤에만 서는 아이는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뒤에 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난 후에도
늘 뒤에 있는 것이 편안해 보였다
주위의 시선과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것을
왜 그리도 익숙해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뒤에 선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침묵으로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안다. 줄을 서면 늘 뒤에 서는 아이가 결코 금수저나 은수저가 아님을. 또한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시대적 환경도 진심은 아닐지라도 결국 인정하며 적응해야만 한다. 그러나 심리적 위축이 시간이 흘러 어느덧 뒤에 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 이후의 패배적 숙명으로 번역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아니 그러지 말라는 당위의 세계는 여전히 막강하다. 여기서도 전복을 읽어낼 수 있다. 뒤집으면 맨 뒤가 맨 앞인 셈이다. 침묵은 그걸 겨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우리 모두가 발붙이고 있는 이 지구라는 별이 둥글고 돌아가는 거라면 동서남북, 위아래가 어디고, 앞뒤가 어디며, 고수高手니 반수半手니 저수低手라니 이 무슨 말인가.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며 사랑으로 수고하는 사람은 다 하나같이 삶의 고수라고 해야 하리라.
사랑다운 사랑을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일다운 일을 하는 사람은 또 몇 명이나 될까. 인간관계, 일 관계, 사회관계, 사랑 관계는 끌림이 있어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인류는 태곳적부터 끌림이라는 신비한 비밀을 갖고 있었다. 끌림은 자연스러운 정보교환이다. 끌림은 긴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상대의 정보를 캐치해 나의 정보와 일치하는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다. 끌림이 있다는 것은 땅김이 있다는 것이다. 끌림과 땅김은 들숨과 날숨처럼 자연스런 것이다.
성적인 욕망도 끌림과 땅김이 있어야 가능하다. 육체적인 사랑도 그러할진대 정신적인 사랑은 말해 무엇 하랴.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 합리적인 이성만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합리성이라는 것은 감정을 배제한 기계 같은 판단이다. 인간의 최대 장점은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이야기는 이성이 하지 못하는 일을 감정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진화의 과정에서 끌림과 땅김의 법칙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끌림과 땅김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여 지구의 최강자가 되었다.
청년들이여, 끌림과 땅김의 법칙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사랑, 질투, 욕망, 꿈, 희망 같은 것은 끌림이 아니면 이루기 힘든 것이다. 사랑이 없는 결혼이 행복하겠는가. 질투가 없는 사랑이 가능하겠는가. 이성이라는 계산기로 두드려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관계를 원하는 청년들은 내면에 숨어있는 끌림과 땅김이라는 강력한 에너지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 에너지가 청춘을 청춘답게 해줄 것이다. 사막 어딘가에 숨은 오아시스처럼 젊음을 빛나게 해줄 것이다.
사랑은 신의 선물
사랑하면 괴롭다. 그래도 사랑하라
사랑하면 외롭다. 그래도 사랑하라
사랑하면 미친다. 그래도 사랑하라
사랑하면 기쁘다. 그러니 사랑하라
사랑하면 즐겁다. 그러니 사랑하라
사랑하면 꿈꾼다. 그러니 사랑하라
사랑은 절박함에서 온다. 사랑은 괴로움에서 오고 사랑은 슬픔의 안개를 뚫고 온다. 시련을 딛고 온 사랑은 그래서 행복의 메신저다.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다. 남녀의 사랑만 추구하는 자 모두 유죄다. 인간만 사랑하는 자, 모두 유죄다. 사랑은 모든 사랑에 대해 무죄다. 불완전한 우리는 사랑으로 인해 완전성을 획득한다. 우리를 더 나은 우리로 만드는 건 사랑밖에 없다. 사랑은 무한한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기술이다. 에너지는 사랑이라는 장치로 돌아간다.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은 에너지로 힘을 합치는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가 흔들리고 혼돈과 질서가 흔들리며 천국과 지옥이 흔들리면서 서로의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긴밀함으로 더욱 가까워진다.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움직이게 한다. 사랑이라는 욕망에 불을 질러라. 사랑이라는 철학에 불을 질러라. 사랑이라는 예술에 불을 질러라. 70억 인류의 욕망을 끌어내라. 욕망이라는 사랑이 진정한 진보다. 그 사랑이 눈물이어도 좋다. 고독이어도 좋다. 기쁨이어도 좋고 희망이어도 좋다. 사랑은 신의 선물이다. 벌이 꽃을 사랑하듯 구름이 하늘을 사랑하듯 물방울이 바다를 사랑하듯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듯 사랑의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라. 미치도록 사랑하고 죽도록 사랑하라. 사랑이라는 이름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은 봄눈처럼 쉽게 사라진다. 잘 꺾이는 나뭇가지와 같다. 붙잡으려고 하면 멀리 달아나는 무지개와 같다. 두려움이 많은 겁쟁이는 사랑 앞에서 벌벌 떤다. 용기 있는 자만이 사랑을 만들 수 있다. 사랑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알 수 있는 지혜의 모든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랑은 신의 선물이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