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하 칼럼] 차이를 추구하는 힘

제7회 코스미안상 은상

[수상소감]

 

서늘한 공기를 나풀거리는 가을이 오니 모든 것이 달갑다. 된더위에 쫓겨 허덕이던 숨결이 조용히 가라앉고, 대신 상쾌한 의식이 솟아올라 모든 활동을 명료하게 한다. 더위에 밀려나 있던 출간 작업을 끌어당겼고 감성과 지성 풀이에 열렬해졌다. 은둔의 벽 속에서. 

 

틈새에서 한 줄기 바람일 듯 문득 먼 거리에 있을 줄 알았던 소식이 제비처럼 빠르게 날아들었다. “가능했던가?” 

 

칼럼 분야의 수상 소식은 처음이다. 애당초 칼럼을 쓴다는 생각을 해오지 않았고, 쓰지도 않았다. 다만 수필을 쓰다 보면, 수필을 걷어차고 뛰쳐나가는 생각들이 있다. 붙잡지 않는다. 오히려 내킨 김에 따라나선다.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느끼며. 

 

‘코스미안상 공모전’ 내용을 보고 좋은 여행지라 생각했다. 여로가 허락될지 의문이었지만, 다행히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분들과 「코스미안 뉴스」가 과히 은혜롭다. 다정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날갯짓이 일어나는.

 

[고운하 칼럼] 차이를 추구하는 힘

 

지난밤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천둥 벼락처럼 요란하면서도 쥐 죽은 듯 고요하게 끝나는 사건이었다. 격한 파열음 소리에 놀라 깨어났지만, 얼떨떨한 의식으로 잠깐 검은 어둠 속에 앉아있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잠 속까지 파고들어 나를 깨웠던 포악한 사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뒷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고, 부부싸움이었다. 

 

뒷집 남자는 양철지붕 위에 우박 떨어지듯 요란하게, 거침없이, 마구 고함쳤다. 고함은 고스란히 부인을 난타하고 있었고, 그것은 부인의 울음으로 변해 고요한 시골 밤을 흥건히 적셨다. 동시에 날카롭고 잔인한 파열음들이 스프링 튕기듯 터져서는 부인의 울음까지도 갈라놓았다. 남편의 포악한 노기에 부인은 속수무책이었다. 한 서린 곡소리만 연신 터트리고 있었다.

 

불안, 불편, 불쾌한 심기가 확 퍼졌다. 인간의 존엄함, 동물성으로부터 탈피한 이성적 양식, 오랜 세월의 긴밀한 접촉, 사랑, 자비, 측은지심. 이들이 미칠 수 없는 무언가의 세계는 존재했고, 그 세계는 앞집의 내게까지 괴물로 다가와 그간 구축해 온 평화의 이상을 마구 찢어놓았다.

 

집안, 또는 부부의 사연이 무엇이건 간에 뒷집 남자의 거친 태도는 부인의 약함을 제물로 한, 무자비한 힘의 군림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성이라는 세계에서 매우 이단적인, 이상스러운 힘의 군림은, 그러나 신성할 정도로 오래도록 숭앙 되며 인류를 지배해 왔다. 이를 우리는 ‘약육강식’이라는 습성적이고도 숙명적인 단어로 설명해 왔다. 

 

하지만, ‘약육강식’이란 생태계의 전유물, 특히 동물계의 전유물이다. ‘약육강식’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동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를 부인할 수 없음을 우리 대부분은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크나큰 수치심을 느낀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를 만나면 그 위용과 웅자의 대단함 앞에서 한낱 작은 짐승으로 벌벌 떠는 신세가 되면서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대함과 존엄성을 앞세운다. 어떤 모순에 빠져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질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동일한 격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반드시 오만한 것은 아니며, 동물계를 떠난 어떤 다른 유형의 존재감을 과시할 여지가 있기도 하다.

 

사실 주옥처럼 잠든 아기, 기도하는 소녀, 완벽한 미를 지닌 여배우, 한 국가의 수장, 성스러운 예지를 지닌 철학자, 깊은 혼을 퍼 올리는 예술가, 거리를 깨끗이 하는 청소부들 볼 때 우리는 단 일 초도, 단 한 점의 동물적 형상도 그려내지 못한다. 물론 스핑크스, 십이지상, 켄타로스족과 같은 신앙적이고 무속적인, 즉 종교성으로서 인간의 동물화를 형상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 역시 생태 상의 동물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 세계를 향한 초월적인 인간 의지의 표본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구태여 놓칠 필요는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며, 인간으로서 인간성의 세계 속에 깃들어야 한다. 인간성의 세계란 양심, 이성과 지성, 도덕과 교양, 사랑, 동정심, 아름다움에 대한 꿈, 평화의 갈구, 정의와 진리에 대한 맹세, 인내와 각성, 욕망의 절제 등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기쁨의 숨결이 물결치는 곳. 우리는 그 기쁨의 숨결을 내쉬어야 한다. 우리의 본능 속에 무엇이 있건, 그것을 나타낼 때는 정성껏 양치질한 입속을 흘러나와 상대를 감미롭게 하는 향기로운 숨결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인간성의 관계는 민족, 국가, 권력, 부, 종교, 또는 사회적 요인 깃든 정신적 장애에 의해 무참히 조롱 되고 있다. 그들은 어떤 경로이건 하나의 세계를 세우고, 다른 세계와의 차이를 추구해 간다. 그리고 피의 공격을 하거나, 음험하게 짓밟거나, 아니면 아예 잔인하게 멸시한다. 거기에 가장 훌륭한 무기 역할을 하는 것은 단연코 힘이다. 

 

힘이라는 것은 단일하지 않고, 여러 가지 기색으로서 제 몫을 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은 정말로 선량한 사람, 즉 인간성을 올바르게 갖춘 사람에게 주어질 때만 그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 빛은 상대와의 차이를 추구하지 않고 웃음을 추구한다. 쓰러진 나무에 깔린 사람을 구하기 위해 힘을 양껏 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그러나 차이를 추구하는 힘. 즉 육체적인 힘, 권력의 힘, 부유의 힘 등은 대부분 권위와 오만, 또는 광기로 채워져 있으며, 그 힘은 이기적 힘이요, 잔인한 힘이다. 이러한 힘을 가진 사람들의 내부엔, 단언컨대 천만 개의 선의 이성을 갈대처럼 흔들어 버리는 단 한 개의 비이성적인 악의 태풍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부모와 교육자, 또는 동료나 어른, 책과 이야기, 스스로의 양심과 타인의 시선 등으로부터 선을 행해야 할 이유 및 의무를 주지 받고 있다. 하지만, 악의 태풍에 의해 죄다 쓸려버리고 말았다. 

 

차이를 추구하는 힘의 군림은 지속적으로 이성을 몰락시켜 왔을 뿐만 아니라, 사회 자체를 자연스럽게 계급화시켰고, 그 계급화를 아예 관습화시켰다. 이제 그 힘은 지구를 덮고 있는 바다와 같이 광대하고, 대기와 같이 거대하게 되었다. 거리의 폭력배들 곁을 슬슬 피해 가는 것이 옳은 일이 되었고, 일진이 동료 학생을 폭력으로 갈취하게 되었고, 하부 직원은 상사의 옳지 못한 지시에도 열렬히 따라야 하며, 고위 관료들은 돈 많은 대기업의 청원을 쉽게 들어주게 되었고, 성직자가 함부로 신이 되어 신도를 조종하게 되었다, 

 

또는 여직원은 공공연히 커피를 타서 날라야 하며, 웨이터는 귀부인들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주문을 받아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의 수발이 되어 헌신해야 하고, 그에 미치지 못할 때는 욕설을 듣거나 매를 맞는 고통을 감수하게 되었다.

 

나는 어젯밤 그것을 보았다. 뒷집에서 나타난 포악한 태풍은 차이를 추구하는 힘의 절정을 나타냈다. 마을 전체를 돌개바람처럼 휩쓸었지만,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뒷집 남편의 광폭한 힘의 군림과 부인의 처절한 비애는 단지 한때 일어난 가정사에 불과했고, 마을은 끝끝내 어둠 속에 꼭꼭 숨어 있었다. 뒷집 남자를 겨우 말리고 돌아오는 길의 착잡함을 절대 바꿀 수 없는 인간의 운명으로 돌린 들, 틀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작성 2025.10.15 09:50 수정 2025.10.15 10:08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