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대 칼럼] 비 오는 날이면 ‘지룡(地龍)’이 생각난다

문용대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릴 적 흙 마당이 떠오른다. 빗물은 초가지붕 아래 처마 밑을 세차게 두드린다. 흙냄새는 온몸을 감싸안았다. 장대비가 쏟아진 뒤, 흙 위로 지렁이들이 미끌거리는 몸을 드러내며 꿈틀거리곤 했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이 신기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저수지나 웅덩이에서 물을 퍼 올릴 때 지렁이가 따라 올라가 구름 속에 머물렀다가, 비가 오면 다시 내려가는 건 아닐까, 혼자 상상하곤 했다. 가끔은 지렁이가 우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찌르르르 하는 소리가 꼭 울음 같았다.

 

알고 보니 지렁이는 피부로 숨을 쉰다. 흙이 빗물에 잠기면 호흡이 막혀 어쩔 수 없이 땅 위로 나온다. 젖은 땅은 그들에게 잠시 쉴 곳이지만, 동시에 목숨을 위협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린 나는 지렁이를 막대기로 툭 건드리면 톡톡 튀어 오르다 다시 둥글게 몸을 마는 그 느낌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곧 새들이 내려와 지렁이를 물고 가는 장면을 목격하면, 놀란 마음으로 지렁이들을 다시 흙 속에 놓아주곤 했다. 어린 마음에는 서글프게 느껴졌지만, 돌이켜 보면 자연의 질서 속에서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젖은 나뭇잎 더미로 지렁이를 옮겨 주었지만, 비가 그치면 미처 피하지 못한 지렁이들이 마당 곳곳에서 말라 있었다.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작은 생명을 보는 경험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지렁이는 생각보다 오래된 존재다. 공룡보다 먼저, 무려 5억 년 전 지구에 나타나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와 흙 속에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래서 지렁이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본래는 ‘지룡(地龍)’, 땅의 용이라 불렸다. 세월이 흐르며 ‘룡’이 ‘렁’으로 바뀌면서 오늘의 이름이 된 것이다. 보잘것없는 작은 몸에 담긴 이름 속 의미가 나는 늘 신기했다.

 

지렁이의 삶은 단순하지만 중요한 일을 한다. 흙을 파고, 먹고, 배설하며 공기와 물길을 열고, 낙엽과 음식물 찌꺼기를 분해해 다시 흙으로 돌려놓는다. 다윈이 “지렁이가 없다면 비옥한 토양도 없다”고 말한 것도 과장이 아니다. 또한 지렁이는 새와 두더지, 고슴도치, 오소리 같은 많은 동물들의 먹이가 되어 생태계의 한 고리를 이어 간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 조용한 움직임이 없으면 흙은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

 

지렁이의 번식 방식도 특별하다. 지렁이는 자웅동체(雌雄同體), 즉 암컷과 수컷의 생식기관을 모두 가지고 있다. 두 마리가 만나 서로 정자를 주고받아 번식하고, 몸의 환대라는 띠 모양 부분에서 알을 낳는다. 잘린 몸이 일부 재생하는 생명력까지 더해져, 지렁이는 수억 년을 이어 올 수 있었다.

 

지렁이는 약자의 상징으로도 살아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은 작은 존재라도 끝내 저항한다는 뜻이다. 글씨를 흉하게 쓰는 이를 두고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라 놀리기도 하지만, 그 꿈틀거림은 오랜 생명의 몸짓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삶도 그 꿈틀거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눈에 띄지 않더라도, 세상의 땅을 굳건히 다지고 비옥하게 만드는 지렁이처럼 말이다.

 

도시에 오래 살다 보니 흙을 밟으며 살던 시절이 더욱 그리워진다. 특히 비 오는 날이면, 아스팔트와 빌딩 숲 아래 숨 막히게 묻혀 있을 지렁이들이 생각난다. 그 꿈틀거림은 단순히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 아니었다. 흙 속에 숨은 생명의 역사와 순환, 그리고 어린 날의 호기심과 연민이 함께 꿈틀거렸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렇게 작은 몸 하나에도 세상을 버티게 하는 힘이 숨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나는 오늘도 비 오는 창가에서 땅의 용, ‘지룡(地龍)’을 떠올린다.

 

 

[문용대]

월간 한국수필로 수필가 등단

한국수필, 문학광장, 한국예인문학, 

문학의봄, 문인협회 회원

매일종교신문, 코스미안뉴스 오피니언 필진 

지필문학 창립10주년기념 수필부문 대상 수상

주간종교신문사, S&T중공업, 전문건설업체 근무

수필집 ‘영원을 향한 선택(選擇)’

이메일 : myd1800@hanmail.net

 

작성 2025.10.16 10:19 수정 2025.10.1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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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