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칼럼] 부드러운 마찰: 인간을 회복하는 느린 기술

제7회 코스미안상 은상

[당선소감]

 

세상은 점점 더 매끄러워지고 있습니다. 일은 자동화되고, 관계는 알고리즘으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인간이 점점 얇아지는 감각을 느낍니다. 저는 그 얇아짐을 되돌리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부드러운 마찰’은 느림을 찬양하는 글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기술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조금의 불편, 약간의 저항, 사소한 마찰이 우리를 다시 사람답게 만든다고 믿습니다.

 

또한 ‘노동의 미래’에 대한 글을 통해, 인간이 단지 생산의 도구가 아니라 의미를 만드는 존재임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기술이 노동을 대신하더라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서로를 위로하고, 문화를 만들고, 관계를 짓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는 존재’에서 ‘되는 존재’로 나아가는 인간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은 빠른 세계 속에서 단순히 ‘속도’를 늦추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의미를 되찾기 위한 감각의 복원술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가 다시 배워야 할 미래의 언어입니다. 인문학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사람답게 살아가려 애쓰기 때문입니다.

 

이번 수상은 저에게 앞으로도 질문을 멈추지 말라는 격려로 받아들입니다.

편리함 속에서도 인간의 결을 잃지 않게 하는 일, 노동이 사라지는 시대에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그 일을 글로써 계속 탐구하겠습니다.

 

끝으로, 이러한 사유의 길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인간의 속도, 인간의 일, 인간의 예의를 다시 묻는 글을 쓰겠습니다. 그것이 인문학이 해야 할 가장 오래된 일이자, 여전히 가장 새로운 일이라고 믿습니다.

 

 

[칼럼] 부드러운 마찰: 인간을 회복하는 느린 기술

 

세상은 “마찰 없는 경험”을 찬양한다.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결제가 끝나고, 스크롤은 바닥이 없다. 편리함은 분명 선인데, 이상하게도 편리함이 깊어질수록 어떤 감각이 얇아진다. 생각의 두께, 선택의 책임, 마음의 잔향이 사라진다. 인간다움은 역설적으로 조금의 불편 위에서 자란다. 나는 이 불편을 마찰이라 부르겠다. 마찰은 방해가 아니라, 인간을 회복시키는 느린 기술이다. 마찰은 움직임을 저지하는 힘이 아니라, 방향을 자각시키는 순간의 걸림이다. 

 

전철 손잡이의 질감, 종이 페이지의 거침, 손글씨의 흔들림은 모두 작은 저항을 남긴다. 이 저항이 멈춤을 만들고, 멈춤은 선택을 만든다. 반대로 마찰이 없는 흐름은 우리를 소비자이자 관찰자로만 남 겨 둔다. 선택은 자동화되고, 책임은 얇아지고, 기억은 빨리 증발한다. 연구들이 말하듯,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가만히 손을 비비는 시간은 창의성과 통찰을 키운다. 뇌가 느슨해질 때 떠오르는 연결들이 있다. 그 연결은 ‘더 빨리’가 아니라 ‘조금의 마찰’을 필요로 한다. 빠른 것은 효율을 높이지만, 느린 것은 의미를 깊게 한다. 

 

도자 장인이 흙을 다룰 때, 그릇의 모양은 손바닥의 압력과 물기, 돌림판의 미세한 떨림으로 결정된다. 작품은 결과물 이전에 접촉의 기록이다. 디지털 화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유리 위로 미끄러지는 손가락은 세계와의 관계를 평탄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일부러 ‘탁’하고 걸리는 경험을 설계해야 한다. 매끈한 폰케이스 대신 거친 천 파우치를 쓰면 주머니에서 꺼낼 때마다 작은 결심을 하게 되고, 태블릿 필름을 종이 질감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메모의 집중도는 달라진다. 종이책은 한 손으로 넘기기 어렵다. 그 어려움이 문장 사이에 공 간을 만든다. 

 

마찰은 예의가 없다기보다, 오히려 예의의 조건이다. 급하게 요청하지 않고, 곧장 판단하지 않으며, 즉시 반응하지 않는 태도. 이 느린 인격이 타인을 안전하게 만든다. 도시에도 마찰이 있다. 보행자 신호의 대기 시간, 벤치의 높이, 공원의 흙길, 도서관의 층고. 이 작은 설계들이 시민의 리듬을 조정한다. 라이트가 즉시 바뀌는 교차로에서는 발걸음이 쫓기고, 흙길이 한 줄 들어선 산책로에서는 호흡이 길어진다. 사람에게 맞춘 마찰은 피로를 줄이고, 타자에 대한 눈길을 늘린다. 도시의 예의는 이미 존재한다. 다만 너무 매끈해져서 보이 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더 빨리”에서 “조금 다르게”로 질문을 옮겨야 한다. 통행 속도를 올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속도가 서로를 보게 만드는가를 물어야 한다. 언어와 이름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이름을 처음 듣고 천천히 따라 말하는 행위에는 마찰이 있다. 혀끝과 입술이 어색하게 모이고, 소리가 몇 번 미끄러진 뒤에야 제대로 얹힌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대를 ‘데이터’가 아니라 한 개체로 받아들인다. 언어의 마찰은 타자에 대한 존중을 낳는다. 빨리 해석되는 말보다, 한 걸음 늦게 다가가는 말이 관계를 지킨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문장을 탁탁 붙이는 대신, 여백과 쉼표를 남기는 것. 빠르게 이해되는 글보다, 느리게 스며드는 글이 오래 기억된다. 삶의 표면에 ‘친절한 마찰’을 심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가능한한 무언가를 직접 만지고 끝내는 것, 화면과 종이에 빈칸을 남기는 것, 즉시성을 지연시키는 것, 함께 쓰기 좋은 접점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되돌릴 수 있는 복구 가능성을 설계하는 것. 이 원칙들은 거창한 사업이 아니라 생활의 미세한 조정이다. 

 

큰 돈이 들지 않는다. 다만 주의가 든다. 주의는 우리의 가장 인간적인 자원이다. 작게 실험할 수도 있다. 회의 시작 전 90초 동안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건을 읽게 하면, 이후의 대화가 달라진다. 휴대폰을 매트 위에 내려놓으면 습관적인 손동작이 줄어든다. 집 안에서 가장 빛이 잘 드는 자리에 ‘느린 책’을 꽂아두면, 앉는 행위 자체가 속도의 전환이 된다. 현관 조명을 한 단계 어둡게 해두면 돌아온 몸이 서서히 풀린다. 

 

이 모든 실험의 공통 점은 한 번 더 손이 간다는 사실이다. 그 한 번 때문에 우리는 조금 더 생각하고, 조금 더 배려하고, 조금 더 기억한다. 교육 역시 마찰을 필요로 한다. 어려운 텍스트, 낯선 개념, 해석의 빈칸은 학습자의 내면에 저항을 만든다. 그 저항을 견디는 힘이 자라면, 사람은 타인의 고통과 복잡성을 버티는 능력을 얻는다. 윤리는 이 능력 위에 선다. 타인을 빠르게 판단하지 않고, 사안을 즉시 결론 내리지 않는 느린 윤리. 창의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연결은 지름길이 아니라 우회로에서 자란다. 우회로는 언제나 조금 거칠다. 미래는 더 빨라질 것이다. 배송은 더 짧아지고, 알고리즘은 더 정교해지고, 화면은 더 매끈해질 것이다. 그때일수록 인문학은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한다. “부드러운 마찰을 남겨라.” 사소 한 걸림돌, 가벼운 지연, 손끝의 거칠기. 이 작은 저항들이 우리의 일상을 사람처럼 만든다. 그리고 사람처럼 산다는 것은 빨리 이기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이해하는 것에 가깝다. 

 

문을 밀고 나갈 때 느껴지는 문고리의 온도, 책장을 넘길 때 손톱에 닿는 종이의 가장자리, 이름을 부르기 전 짧은 숨. 여기에 인간다움이 있다. 편리함을 의심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 편리함이 우리를 너무 매끈하게 흘려보내지 않도록, 표면을 살짝 거칠게 하자는 주장이다. 부드러운 마찰은 방해가 아니라 환대의 형식이다. 

 

서로를 더 잘 만나기 위한 기술, 나를 낭비하지 않기 위한 기술, 의미를 오래 붙잡기 위한 기술. 그러므로 미래의 표어를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빨라지는 세계일수록, 느림의 표면을 설계하라.” 그 표면 위에서 우리는 다시 사람을 배운다

 

작성 2025.10.17 06:31 수정 2025.10.17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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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