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처구니’는 ‘어이’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둘 다 맷돌 손잡이나 궁궐 처마 끝의 장식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처구니’는 우리 말에서 황당하거나 기가 막힐 때 느끼는 놀라움이나 어이없음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말이나 행동이 전혀 예상 밖이거나 상식에서 벗어났을 때 사용되며, 보통 ‘없다’와 함께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지금, 우리의 지붕 위에는 무엇이 있나?
살다 보면 우리는 종종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마주했을 때, 상식과 기대를 무참히 배반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기가 막힌 실소를 터뜨리며 이 한마디를 던진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날아온 비수 같은 말 한마디, 평생을 바친 일의 허무한 결말, 상상조차 못 했던 시대의 광기 앞에서, 우리는 맥이 풀리는 당혹감과 함께 이 단어를 떠올린다. ‘어처구니’.
그 어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궁궐 지붕의 추녀마루 끝에 올리는 기와 인형 ‘잡상(雜像)’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온갖 재앙과 악귀를 막아준다고 믿었던 수호의 상징. 또 다른 설로는, 맷돌의 손잡이나 버팀목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무엇을 잡고 돌려야 할지, 어디에 기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 결국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것은, 내가 믿고 의지하던 최후의 보루가 사라졌을 때, 나를 지켜주리라 믿었던 수호신이 부재할 때의 황망함을 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오늘, 이 단어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만약, 궁궐의 지붕을 지키던 그 ‘어처구니’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그분의 준엄한 명령 앞에서, 우리가 단호히 파괴해야 할 우상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이 말은, 허망함의 탄식이 아니라, 가장 단호하고 순결한 신앙고백이 된다. “나의 삶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습니다. 나의 인생 지붕 위에는 그 어떤 잡상도 올려놓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결단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붕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각양각색의 ‘어처구니’가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잡상, 현대의 우상들
십계명의 첫머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아라.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든지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에 절하거나 그것을 섬기지 말아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애굽기 20:3-5).
하나님의 이 음성은 시퍼렇게 날이 선 칼과 같아서, 우리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겨눈다. 그분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이 말은 그분이 변덕스럽거나 편협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랑이 신부의 사랑을 독점적으로 원하듯,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서 온전한 마음과 전적인 신뢰를 요구하신다는 뜻이다. 그분의 사랑은 분할될 수 없으며,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우상’이라고 하면 금송아지나 돌부처 같은 형상을 떠올리며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쉽게 단정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우상의 본질은 훨씬 더 교활하고 내면적이다. 우상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마음의 왕좌를 찬탈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안정감, 정체성, 기쁨과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으려는 모든 시도가 바로 우상숭배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삶의 지붕 위에 은밀하게 올려놓은 현대판 ‘어처구니’들이다.
어떤 이의 지붕 위에는 ‘맘몬’이라는 이름의 어처구니가 올라가 있다. 돈이 곧 능력이며, 성공이 곧 구원이라는 믿음이다. 그는 통장의 잔액이 늘어날 때 평안을 느끼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 때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한다. 그는 기도는 하지만, 정작 그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더 많이’라는 탐욕의 주문이다.
또 다른 이의 지붕 위에는 ‘자아’라는 어처구니가 앉아 있다. 그는 자기 계발과 자아실현을 삶의 최고 목적으로 삼는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외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하고 계획할 수 있다는 교만한 믿음 속에서, 그는 자기 자신이 만든 신을 숭배하고 있다.
가족이나 자녀, 연인이 ‘어처구니’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완벽한 사랑과 채워짐을 갈망한다. 그들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 되고, 그들의 행복이 나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에게서 무한한 신적 만족을 구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처절한 실망으로 끝난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결코 숭배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교회 일이나 이념, 정치적 신념조차 우리의 ‘어처구니’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선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보다 앞서는 순간, 그것은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가장 위험한 우상이 된다.
인간 내면의 심리: 왜 우리는 ‘어처구니’를 세우는가?
우리는 왜 이토록 끈질기게 하나님 아닌 다른 ‘어처구니’들을 만들어 세우는가? 그 심리적 기저에는 깊은 불안과 통제 욕이 자리 잡고 있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으며,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운 존재이다. 그분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든 우상, 즉 돈, 성공, 자아, 관계와 같은 ‘어처구니’들은 우리의 손에 잡히고, 계산이 가능하며,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다. 그것들은 우리의 노력에 따라 반응하는 걸로 보인다. 결국 우상숭배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험을 감수하기보다, 내 손안의 확실성을 붙잡으려는 비겁한 자기 방어 기제인 셈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한 욕망이 있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이 원죄적 본능은,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삶의 창조주가 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형상을 따라 신을 빚어낸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투영하여 ‘성공의 신’, ‘건강의 신’, ‘인정의 신’을 만들고 그 앞에 절한다. 결국 모든 우상숭배의 끝에는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향한 숭배, 즉 자기애(自己愛)라는 가장 강력한 우상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슬픈 자기기만인가. 우리는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힌 채, 그것이 안전한 성(城)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영혼의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할 소금물을 들이켜면서, 언젠가는 이 갈증이 멈출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반드시 무너지는 지붕: ‘어처구니 있는’ 삶의 비극
문제는, 우리가 세운 모든 ‘어처구니’는 반드시 무너진다는 사실이다. 시편 기자는 우상과 그것을 만든 자들의 운명을 이렇게 노래한다.
“그들의 우상은 은과 금으로 사람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입이 있어도 말 못 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며…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신뢰하는 자는 모두 그 우상처럼 될 것이다.”(시편 115:4-8)
우리는 우리가 숭배하는 것을 닮아간다. 돈을 숭배하는 자의 영혼은 동전처럼 차갑고 딱딱해진다. 성공을 숭배하는 자의 내면은 실적 그래프처럼 불안하게 요동친다. 사람을 숭배하는 자의 감정은 그 사람의 변덕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우리는 생명 없는 우상을 섬기다가, 결국 우리 자신도 생명력을 잃은 존재, 즉 영적으로 보고 듣고 깨닫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의지하던 그 ‘어처구니’가 힘을 잃는 순간이 찾아온다. 경제 위기로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건강이 무너지며, 믿었던 관계가 깨어지고, 자녀가 엇나간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본래 의미의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내가 나를 지켜주리라 믿었던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폐허 위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하게 서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어처구니 있는 삶’, 즉 우상을 둔 삶의 필연적인 결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당신 아닌 다른 것에 기대어 서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속이는 거짓된 안전 장치들을 친히 허물어뜨리신다. 그 고통스러운 붕괴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어처구니’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유일한 기회이다.

‘어처구니없는’ 삶을 향한 거룩한 결단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 삶의 지붕 위에 자리 잡은 견고한 우상들을 철거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우상을 파괴하는 유일한 길은, 더 크고 강력하며 참된 사랑의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십자가는 이 세상의 모든 ‘어처구니’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세상이 가장 강력한 ‘어처구니’로 숭배하던 권력, 돈, 명예, 힘이 총동원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모든 세상의 우상들을 발아래 두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얽매던 모든 거짓 신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분의 사랑 앞에서, 세상의 모든 보화는 빛을 잃는다.
이제, 우리는 담대하게 선언해야 한다.
“나의 삶에는 어처구니가 없다!” 아니, “어처구니는 없어야 한다.” 이것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희망과 자유의 선언이다. 나의 지식, 나의 재능, 나의 재물, 나의 관계, 그 어떤 것도 나의 궁극적인 의지처가 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며, 나의 피난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삶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어처구니없다”라고 조롱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살아가는 것이 어리석고 무모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그 ‘어처구니없음’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가장 영광스러운 삶의 모습이다.
세상의 모든 버팀목이 무너져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유일한 토대 위에 서는 삶. 그것이 바로 참된 평안과 자유를 누리는 길이다. 이제 당신의 삶의 지붕을 정직하게 올려다보라. 그리고, 그 위에 놓인 거짓된 잡상들을 하나씩 떼어내라. 그리하여 당신의 삶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인해 온전히 세워지는 거룩한 전(殿)이 되게 하라.
이제, 우리의 삶에서 ‘어처구니’는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