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기독교:영원을 향한 두 갈래의 길, 그리고 하나의 질문

-같은 하늘 아래, 다른 천국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묵상.

-본질적 차이: 천국은 ‘환경’인가, ‘관계’인가?

-같은 갈망, 다른 길의 끝.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낯선 언어가 소용돌이치는 중동 시장의 소음 속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젊은 시절, 기독교인으로서 순수한 열정만으로 세상을 보던 나는 내가 만나는 무슬림들을 그저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그들의 기쁨과 슬픔이 깃든 삶의 자리에 함께하며,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들 역시 나와 똑같이 이 유한한 삶 너머의 영원한 안식처를 간절히 소망하는, 신을 찾는 순례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느 해 라마단 기간, 해가 저문 뒤 허기를 채우며 대화를 나누던 내 친구인 여행사 사장, 에르군이 내게 물었다. “당신네 기독교인이 말하는 ‘천국’은 결국 우리의 ‘잔나(Jannah)’와 같은 곳이 아닙니까? 둘 다 고통이 없는 낙원이잖습니까.” 

 

그 질문은 신학적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고단한 삶의 끝에서 마주할 궁극의 소망에 대한, 한 영혼의 진지한 탐구였다. 오늘 나는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시작으로, 영원을 향한 두 신앙의 길이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에 대한 오랜 묵상을 나누고자 한다.

 

본질적 차이: 천국은 ‘환경’인가, ‘관계’인가?

 

이야기의 시작점을 조금 달리해보자. 흔히 두 종교의 천국을 비교할 때 ‘어떻게 가는가’의 방법론부터 논하지만, 더 근원적인 차이는 ‘천국이 무엇인가’라는 본질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꾸란이 묘사하는 천국은 지상의 모든 결핍이 완벽하게 채워지는 감각적 행복의 극치로 그려진다. 

 

시원한 강물이 흐르는 정원, 달콤한 과일과 풍성한 음식, 화려한 비단옷과 보석, 그리고 아름다운 배우자(후리, Huri)의 시중.⁴ 이는 척박한 사막 기후에서 생존해야 했던 이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행복을 구체적으로 약속한 것이다. 즉, 천국은 최상의 ‘환경’이자 ‘조건’의 장소다.

 

반면,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의 핵심은 ‘조건’이 아닌 ‘관계의 회복’에 있다. 

 

물론 성경 역시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과 황금으로 된 성곽 등 천국의 황홀한 모습을 묘사하지만, 그 모든 것의 존재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 것은 최고의 환경이 아니라,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어 그분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값비싼 선물을 주는 사람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람의 차이와 같다. 당신은 화려한 보석으로 가득한 빈 궁전을 원하는가, 아니면 비록 작은 초막일지라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삶을 원하는가? 이슬람의 천국이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들’로 가득한 곳이라면, 기독교의 천국은 ‘선물이신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한 곳이다.

 

방법론적 차이: 천국은 ‘성취’인가, ‘선물’인가?

 

천국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이처럼 다르기에, 그곳에 이르는 길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최상의 환경’으로서의 천국은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이에게 주어지는 ‘보상’의 성격을 띤다. 

 

이슬람에서는 최후 심판의 날, 거대한 저울(미잔, Mizan)에 각자의 선행과 악행을 달아 그 무게를 측정한다고 믿는다. 선행의 무게가 더 무거운 자만이 알라의 자비에 힘입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 이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공정해 보인다. 내가 노력하고 성취한 만큼 대가를 받는다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의 회복’으로서의 천국은 나의 노력이나 자격으로 성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깨어진 관계는 나의 일방적인 노력으로 회복되지 않으며, 특히, 전능하고 거룩하신 창조주와의 관계는 더더욱 그렇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의로움이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하며,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임을 분명히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³

 

그렇다면, 어떻게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 편에서 먼저 내어주신 화해의 손길이자, 우리의 모든 죄의 빚을 대신 갚으신 사랑의 확증이다. 천국은 내가 쌓은 공로의 탑 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의 손을 그저 믿음으로 붙잡을 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같은 갈망, 다른 길의 끝에서

 

결론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은 모두 이 땅의 수고로움이 끝나는 영원한 안식을 소망한다는 점에서 같은 갈망을 공유한다.

 

“수고로움도 없고, 헛된 말도 없으며, 오직 ‘평화, 평화’라는 말만 있는 곳”²이라는 꾸란의 묘사와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¹라는 성경의 약속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 평화의 본질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곳에 이르는지에 대한 대답에서 두 길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한 길은 나의 의와 공로를 의지하여 최상의 환경을 얻기 위해 나아가는 길이며, 다른 한 길은 나의 자격 없음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 자신에게 나아가는 길이다.

 

오랜 기간 이 두 갈래의 길 위에서 고민하는 수많은 영혼을 만났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확신 속에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기도하며 외친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그저 좋은 곳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시고 아들까지 내어주신 ‘아버지의 품’이라고.

 

이제 당신의 영혼에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영혼이 최종적으로 안식할 곳은, 당신의 행위로 쌓아 올린 화려한 성인가, 아니면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사랑의 품인가?"
 

 

작성 2025.10.25 02:15 수정 2025.10.2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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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