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그림이 숙명이라면 작은 그림은 운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별들 가운데 지구라는 별에, 수많은 생물 중에 인간으로, 어떤 나라와 사회 그리고 지역에, 어느 시대와 시기에, 어떤 부모와 가정환경에, 어떤 신분과 여건에, 어느 성별로 태어나느냐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하는가가 운명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숙명의 ‘宿’은 잘 숙 자이고 운명의 ‘運’은 운전할 운 자인 것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고정된 게 숙명이고 변하는 게 운명이란 뜻인가. 영어로는 destiny, doom, fate, fortune, lot 등의 단어가 사용된다. 영어 노래 제목에도 있듯이 ‘넌 나의 운명’이라 할 때는 ‘넌 나의 종착지’란 의미에서 ‘넌 나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폴 앵카가 부른 노래 가사를 우리 음미해보자.
넌 나의 숙명 You are my destiny
넌 나의 숙명 You are my destiny
넌 나의 꿈 You share my reverie
넌 나의 행복 You are my happiness
그게 바로 너야 That's what you are
(넌 나의 숙명이야 You're my destiny)
넌 내게 안겨 있지 You have my sweet caress
넌 내 외로움을 달래주지 You share my loneliness
넌 내 꿈이 이루어진 현실이지 You are my dream come true
그게 바로 너지 That's what you are
(넌 내 숙명이지 You're my destiny)
하늘 하늘만이 Heaven and Heaven alone
네 사랑을 내게서 앗아갈 수 있어 Can take your love from me
내가 널 떠난다면 'Cause I'd be a fool
난 정말 바보일 거야 To ever leave you dear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And a fool I'd never be
넌 나의 숙명 You are my destiny
넌 나의 꿈 You share my reverie
넌 내 목숨 이상이야 You're more than life to me
그게 바로 너야 That's what you are
넌 내 숙명이야 You are my destiny
넌 내 꿈이야 You share my reverie
넌 내 행복이야 You are my happiness
그게 바로 너야 That's what you are
(나의 숙명 My destiny)
영어로 It was my fate to be or to do라고 할 때 ‘내가 어떻게 되거나 뭘 하게 될 운명 또는 숙명이었다.’고 하는가 하면 ‘운명의 총아’라 할 때는 ‘a child of fortune’이라고 행운아란 뜻이고, ‘누구와 운명을 같이 한다’ 할 때는 ‘cast one's lot with someone’라고 ‘one's lot’ 곧 ‘내 몫을 누구에게 건다.’고 한다. 그리고 ‘He met his doom bravely.’ 할 때처럼 ‘doom’은 불행한 종말을 가리킨다. 최근 영국에 사는 친구가 영국 여왕의 어렸을 때부터 찍힌 사진들을 동영상으로 보내온 것을 보고 나는 이렇게 한마디 코멘트를 답신으로 보냈다.
“왕관의 노예로 90평생을 살고 있는 모습 보기 딱하다”고 일침해서 보냈다. 물론 세상에는 이 영국 여왕의 신세를 부러워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는 사랑을 위해 대영제국의 왕위를 버린 윈저공을 떠올렸다. 조지5세의 아들로서 1936년 4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미국의 이혼녀 심슨부인과의 사랑 때문에 퇴위한 에드워드8세 얘기다. 당시 라디오를 통해 퇴위를 발표한 그의 대사 전문을 옮겨본다.
“오래 고심 끝에 몇 마디 내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난 언제나 아무것도 숨기려 하지 않았으나 지금까진 헌법상 밝힐 수가 없었다. 몇 시간 전에 왕이자 황제로서 내 마지막 임무를 마쳤고 이젠 내 아우 요크공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내가 할 첫 마디는 그에 대한 내 충성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를 나는 충심으로 하는 바이다. 백성 모두가 내가 퇴위하게 된 이유를 잘 알고 있겠지만 내가 결심하는데 있어 지난 25년 동안 웨일즈 왕자 그리고 최근에는 왕으로서 섬기려고 노력해온 나라와 제국을 잠시도 잊지 않았음을 알아주기 바라노라.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뒷받침 없이는 왕으로서의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내 말을 백성들은 믿어주기를 바라노라. 또한 이 결정은 나 혼자 한 것임을 알아주기를 바라노라. 전적으로 나 스스로 판단해서 내린 결정이었음을. 내 곁에서 가장 걱정해준 사람은 마지막까지 내 결심을 바꿔보려고 애썼다는 사실도. 무엇이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최선이겠는가, 단 한 가지 생각으로 내 인생의 가장 심각한 이 결심을 나는 하였노라.
이렇게 결심하기가 좀 더 쉬웠던 것은 오랫동안 이 나라의 공적인 업무수행교육을 잘 받아왔고 훌륭한 자질을 겸비한 내 아우가 즉시 내 뒤를 이어 제국의 발전과 복지에 어떤 차질이나 손실 없이 국사를 잘 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많은 백성들도 누리지만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축복, 처자식과 행복한 가정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노라.
이 어려운 시기에 나의 어머님 국모님과 가족들로부터 난 위안을 받았고, 내각 특히 볼드윈 수상이 항상 나를 극진히 대해 주었으며, 각료들과 나 그리고 나와 국회, 우리 사이에 헌법상 어떤 이견도 없었노라. 내 선친으로부터 헌법에 기준한 전통을 이어받은 나로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허용치 않았을 것이었노라. 내가 웨일즈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그리고 왕위에 오른 뒤 대영제국 어디에 거주했던 간에 가는 곳곳마다 각계각층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친밀감에 대해 깊이 감사하노라.
이제 내가 모든 공직에서 떠나 내 짐을 벗었으니 외국에 나가 살다가 고국에 돌아오려면 세월이 좀 지나겠지만 나는 언제나 대영제국의 번영을 기원하면서 언제라도 황제 폐하께 공인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섬길 일이 있다면 주저치 않을 것임을 천명하노라. 자, 이제, 우리 모두 새 왕을 맞았으니 그와 그의 백성 모두에게 행복과 번영이 있기를 충심으로 기원하노라. 백성 모두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왕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 에드워드8세(1936년 12월 11일)
윈저공의 경우는 왕관의 노예가 아닌 사랑의 노예였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권력이나 명예나 재산의 노예가 되기보다 사랑의 노예가 되는 게 비교도 할 수 없이 그 얼마나 더 행복한 일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왕위까지 버릴 수가 있었을까. 그런데 사랑보다 더 무서운 건 생각하기에 따른 사상과 믿기에 따른 신앙이란 허깨비들이 아닐까.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사회운동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는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혐오의 근본 원인을 찾아보자. 영어로 여성혐오는 misogyny라 하는데 여성을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 말고도 성차별을 비롯해서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의 성적 도구화까지 다양하다. 서양에서는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는 둥, 아담에게 금단의 선악과를 먹여 낙원에서 쫓겨나도록 한 것도 여성인 이브라는 둥, 구약성서 창세기 설화가 있는가 하면, 봉인된 판도라의 항아리를 열어 세상에 죽음과 질병, 질투와 증오 같은 재앙을 불러 온 것도 최초의 여자 ‘판도라’라는 그리스 신화기 있다.
동양에서도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어 우리 한국에서는 “여성은 알게 할 것이 없고 다만 좇게 할 것”이라는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그 근본이었다. 그래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까지 있지 않나. 중국에는 전족이라고 계집아이의 발을 어려서부터 피륙으로 감아 작게 하던 풍속이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공식 석상에서 아내는 남편과 나란히 걷지 못하고 세 걸음 뒤에서 따라가야 하는 등 온갖 폐습이 있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중동에선 여성들만 히잡을 착용, 마치 닌자처럼 복면을 하고 다녀야 하고 아프리카에선 여성에게만 하는 검열삭제라고 여성 생식기를 못 쓰게 만드는 미개한 짓거리가 아직도 자행되고 있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노래 “My my my Delilah Why why why Delilah”라는 팝송의 후렴구 ‘Delilah’는 웨일스 출신 가수 톰 존스의 노래로 웨일스인들에겐 국가에 해당하고, 2012년 엘리자베스 2세 즉위 60주년 행사에선 ‘떼창’을 했었는데 그 노랫말은 한마디로 하자면 ‘데이트 살해’다. 사랑한 여인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 알고 칼을 휘두르는 내용이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마녀사냥의 사냥개나 숙명이든 운명이든 모든 신화와 전설과 인습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모든 걸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의 노예가 되어보리. 남녀 불문하고 우리 어서 남신男神은 흔적도 없이 화장해 버리고 여신女神 시대로 천지개벽하는 뜻에서 정현경의 여신女神 십계명을 받아 지켜보자.
1. 여신은 자신을 믿고 사랑한다.
2. 여신은 가장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한다.
3. 여신은 기, 끼, 깡이 넘친다.
4. 여신은 한과 살을 푼다.
5. 여신을 금기를 깬다.
6. 여신은 신나게 논다.
7. 여신은 제멋대로 산다.
8. 여신은 과감하게 살려내고, 정의롭게 살림한다.
9. 여신은 기도하고 명상한다.
10. 여신은 지구, 그리고 우주와 연애한다.
요즘 ‘연애를 공부하는 청춘’들이 늘고 있어 ‘연애 토크콘서트’ 행사가 유행한다는데 우리 생각 좀 해보자. 연애가 사랑을 위한 것이라면 그 방법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이 빛과 열 같은 것이라면 아무리 가려도 어느 틈새로라도 뚫고 나와 날이 새듯 빛은 비추게 되고, 어떤 물질을 통해서라도 열은 그 더운 기운을 발산하게 되지 않든가. 첫눈에 반하면 반하는 것이지 내가 좋아하겠다고 해서 좋아지지 않는 일이다. 물론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좋아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 테지만 이런 요행의 두 사람은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라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데 상대방이 날 좋아하지 않거나 어느 누가 날 좋아하는데 내가 별로인 예가 흔한 것 같다. 이럴 경우 나 혼자서만 계속 짝사랑하면서도 상대방을 결코 괴롭히지 않고 그 사람의 행복을 늘 빌어줄 수 있다면, 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다. 서로 거의 똑같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부지하세월일 테니 일찌감치 적당히 편의상 결혼까지 했다가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못해 계속 같이 살거나 아니면 이혼해 헤어지는 수도 있다. 그리고 결혼을 하건 안 하건 또 이미 했건 안 했건 그 누구와도 순간순간 숨 쉬듯 언제나 사랑은 하고 살 수 있지 않은가. 한 사람도 좋고 백 사람도 좋고, 어린애도 좋고 어른도 좋고, 이성도 좋고 동성도 좋고, 우주 만물을 다 좋아할 수 있지 않나.
연애가 시라면 삶은 산문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 반대로 산문으로 시작해서 시로 변하는 수도 있으리라.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수업이 필요할 것 같다. 한 인간이 인류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수업 말이다. 이는 나 자신이 소우주이듯 한순간이 곧 영원의 결정체임을 알게 되는 인생수업을 통해서만 가능하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