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하는 아이보다, 감정 잘 말하는 아이로

단어보다 중요한 감정의 언어

감정을 말하는 힘이 사회성을 키운다

언어는 감정의 그릇이다

 

사진 = AI 생성 ⓒ패밀리트립저널

 

“우리 아이는 또래보다 말을 늦게 해요.”
육아 커뮤니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고민 중 하나다. 많은 부모가 아이의 언어 발달 속도에 불안을 느낀다. 옆집 아이는 문장으로 말하는데, 우리 아이는 단어 몇 개만 말한다며 초조해한다. 언어 발달 검사를 받아볼까, 치료를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는 부모도 많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말한다. “단어 수보다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아이가 몇 개의 단어를 말하느냐보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언어로 드러낼 수 있느냐가 진짜 언어 발달의 핵심이다.

‘싫어’, ‘내 거야’, ‘좋아’ 같은 말은 단순한 어휘가 아니다. 이는 감정을 언어로 바꾸는 첫 시도다.
이 시기의 아이는 행동보다 말로 감정을 드러내는 법을 배우며, 이것이 향후 사회성과 정서 발달의 기초가 된다.


 

 

만 3세 전후의 아이는 어휘가 급격히 늘고 문장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엄마 물 줘”, “나도 할래” 같은 표현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겉으로 보기엔 언어 발달이 순조로워 보인다.

그러나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아이는 배가 고픈지, 졸린지, 심심한지, 화가 난 건지 스스로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다. 불편한 감정을 “싫어”, “안 해”로 뭉뚱그려 표현한다.

부모는 이를 부정적인 표현으로 여기고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야”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 “싫어”나 “안 해”는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 의사와 감정을 구분해내는 과정이다.

이 시기의 아이는 느낀 감정을 말로 정리하는 힘을 기른다. 이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느끼는 것’과 ‘남이 느끼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부모가 이를 존중하고 기다려줄 때,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법을 배운다.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은 단순한 언어 기술이 아니다. 이는 공감과 사회성의 출발점이다.
국내외 아동 발달 연구에 따르면, 감정 어휘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아동일수록 또래 관계 적응력이 높은 경향을 보인다.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아이는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도 함께 자란다.
 

“친구가 울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는 “친구가 슬픈가 봐”라는 이해로 나아간다.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한 경험이 쌓일수록 타인의 감정도 읽어낼 수 있다. 반면 감정을 억누르거나 금지당한 아이는 스스로의 감정을 판단하기 어렵다.
“울면 안 돼”, “화내지 마”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은 아이는 자신의 감정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 결국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대신 행동으로 표출하게 된다.

 

부모가 아이의 감정 표현을 허용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났구나”, “속상했지?”처럼 감정을 이름 붙여 주면, 아이는 스스로 감정을 구체화하며 언어로 정리하는 힘을 기른다. 이는 단순히 어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이다.


 

 

언어심리학에서는 감정을 ‘이름 붙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조절 가능한 감정’으로 본다.
즉, 아이가 “슬퍼”, “무서워”, “좋아”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감정을 행동으로 표출하지 않고 언어로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막연한 불안감은 견디기 어렵지만, “나는 지금 실패가 두려워서 불안한 거야”라고 구체화하면 그 감정을 다룰 방법이 생긴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감정은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들어온다.

 

아이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울며 바닥에 드러눕는 것은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화가 났구나”, “장난감을 갖고 싶은데 안 사줘서 속상하지?”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면, 아이는 점차 자신의 감정을 구분하고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이 시기의 부모 역할은 아이의 감정을 대신 해석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언어적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건 하면 안 돼”보다 “지금 화가 났구나”, “왜 울어?”보다 “슬퍼서 눈물이 나왔구나”라는 말이 아이에게 감정의 언어를 배우는 기회를 제공한다.


 

 

몇 달 전만 해도 아이는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고 토라지곤했다.
하지만 요즘은 “엄마, 나 화났어”라고 말한다. 여전히 눈물을 흘리지만, 그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이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가 울 때마다 “왜 우는 거야”라고 다그치는 대신, “많이 속상했구나”라고 감정을 읽어주었다.
아이가 떼를 쓸 때 “그만해”라고 말하기보다 “지금 화가 많이 났나 보네”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처음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엄마, 속상해”, “화났어”라는 표현이 들려왔다.
감정을 말로 표현한 후에는 훨씬 빠르게 진정했다.

 

‘말 잘하는 아이’는 부모의 자랑일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을 잘 말하는 아이’는 세상과 건강하게 소통하는 힘을 가진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공감 능력, 자존감, 관계 형성의 토대가 된다.

 

 

요즘 육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아이에게 “말 좀 예쁘게 해”라고 훈육하기보다, 그 말 속에 담긴 감정을 먼저 들어주는 일이다.
아이가 “싫어”라고 말할 때 “그렇게 말하면 안 돼”라고 가르치기보다 “지금 하기 싫은 마음이구나”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결국 아이의 언어는 부모의 언어에서 자란다.
부모가 감정을 존중하고 언어로 표현해 주면, 아이도 자연스럽게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반대로 부모가 감정을 억누르거나 부정하면, 아이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행동으로 표출하게 된다.

 

아이의 단어 수에 집착하지 말자. 대신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자.
그것이 진짜 언어 발달이며, 건강한 정서 발달이고, 사회성의 기초다.

오늘도 아이는 말한다. “엄마, 나 지금 기뻐.”
그 한마디가 수백 개의 어휘보다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작성 2025.10.25 11:32 수정 2025.10.2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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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