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속의 역할 혼동: 아이는 왜 엄마를 ‘여보’라 부를까?

‘여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유아의 신호

애착과 경계: 부모-아이 관계의 숨은 지도

역할 혼동이 발달에 미치는 그림자와 빛

[놀이심리발달신문] 놀이 속의 역할 혼동: 아이는 왜 엄마를 ‘여보’라 부를까? 홍수진 기자

 

‘여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유아의 신호

 

아이에게 “엄마를 ‘여보’라고 부르며 가슴을 만지는 놀이”라는 상황은 얼핏 보기엔 충격적이거나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이면에는 유아 특유의 상징놀이와 관계 탐색, 역할 모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만 37개월(약 3세 록) 유아는 아직 자기 정체감과 타인과의 경계를 완전히 구분하지 못하는 시기이며, 부모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탐색한다. 

 

이럴 때 아이가 엄마를 ‘여보’라고 부른다면 이는 단지 장난이거나 모방일 수 있지만, 동시에 부모-자녀 관계 속에서 경계가 흐려지는 ‘역할 혼동(role confusion)’의 징후일 수도 있다. 예컨대, 부모가 아이에게 너무 “친구처럼”, “동료처럼”, 또는 “부부처럼” 다가가고 있다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 역할에 맞추어 행동하게 된다. 

 

연구에 따르면 Judith Macfie 등이 말한 ‘역할혼동(parent-child role-confusion)’ 개념은 부모가 아이를 돌보는 역할을 넘어 정서적·기능적 지지를 아이에게 기대하거나 아이가 부모의 정서적 필요에 반응할 때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놀이 속에서 아이가 “여보”라고 부르고 가슴을 만지는 행동은 단순히 성적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부모와의 관계-역할을 탐색하고 경계를 시험하는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즉 “나는 엄마의 친구인가? 엄마의 동료인가? 엄마의 남편 역할을 흉내 내는 걸까?”라는 내면의 질문이 비언어적·놀이적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놀이는 아이에게 안전한 실험장이며, 이 시기의 아이는 자신과 타인의 역할을 반복하고 뒤섞으면서 ‘나는 누구인가’, ‘엄마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또한, 아이는 관찰된 언어나 행동을 모방한다. 유아모델링(imitation)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2–3세 아동이 부모 혹은 주변 성인의 언어 및 행동을 흉내 내는 것은 매우 일반적이다. 아이가 ‘여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마도 부모 혹은 가정·매체 속 대화를 목격했거나 유아에게 친숙했던 관계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놀이 언어 속에 자리 잡은 역할 탐색은 목록화된 ‘문제행동’이 아니라 아이가 관계를 실험하고 있는 순간일 수 있다.

 


애착과 경계: 부모-아이 관계의 숨은 지도

 

아이와 부모 사이의 애착관계는 발달 초기부터 아이의 정서·사회 능력 형성에 결정적이다. John Bowlby와 Mary Ainsworth가 정립한 애착이론(Attachment Theory)은 아이가 부모를 안정적인 ‘안전기지(safe base)’로 삼아 탐색하고 다시 복귀하는 과정을 통해 정서적 안정과 세계 탐색 능력을 키운다고 본다. 

 

그런데 이 과정 속에서 부모와 아이 사이의 역할 경계가 흐려질 때, 즉 부모가 아이에게 정서적·기능적 역할을 기대하거나 아이가 부모의 감정·기능을 대신하려 들면 ‘역할 혼동’이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부모가 자신의 스트레스, 외로움, 부부갈등 등을 아이 앞에서 드러내고 아이가 이에 반응한다면, 가족체계상 아이는 보호받는 존재가 아닌 ‘도움 주는 존재’로 전환될 수 있다. 

 

실제로 연구는 부모-아이 간 역할 혼동이 아이의 심리사회적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Lisa Vulliez‑Coady 등의 연구에서는 엄마-아이 간 경계의 불분명함이 아이에게 정서적 불안·부적응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같은 맥락에서, 아이가 놀이 중 “여보”라 부르며 엄마의 가슴을 만지는 행동은 단순한 역할놀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이와 엄마 사이의 경계가 조금 흐려져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아이가 엄마를 ‘여보’라고 부를 만큼 ‘엄마-아들’ 관계 외의 다른 역할과 그림자를 탐색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때 부모는 이를 단순히 제지하기보다는, “지금 네 마음이 어떤 걸까? 엄마와 너 사이에서 어떤 느낌을 갖고 있을까?”라는 따뜻한 관심을 통해 아이의 메시지를 읽어줄 필요가 있다.

 


역할 혼동이 발달에 미치는 그림자와 빛

 

발달심리학 문헌은 역할 혼동이 무조건 해롭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Kathryn DiMarzio 외의 2021년 연구는 부모의 양육 행동과 공동부모 관계가 역할 혼동 발달에 핵심적 요인임을 밝혔고, 부모의 우울증이 직접적이라기보다 갈등을 통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또한 Macfie 등이 쓴 리뷰에서는 역할 전환이 아이에게 일정 수준에서 도전이 될 수 있지만, 아이의 능력 범위 내에서 적절히 허용될 경우 자기효능감을 키우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할 점이 있다. 역할 혼동이 과도해지면 아이는 자신의 발달과 탐색 역할에 부담을 느끼고, 부모의 정서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에너지를 쓰면서 자신의 자율성과 자기표현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예컨대 아이가 부모의 친구나 배우자 역할을 대신하면서 본연의 ‘아이’로서 누려야 할 놀이-탐색-자율성을 상실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아이가 “여보”라 부르며 엄마에게 친밀감을 표현하고 몸을 만지는 행동은 관계형 경계의 흐림을 시사하므로, 이 상태가 반복되고 일상화된다면 아이는 ‘친구-엄마’ 혹은 ‘미니부부’ 역할에 머물러 정서적으로 아이답지 못한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만약 이 놀이가 즐겁고 아울러 아이가 집에서 또래와 놀이나 자율적 탐색을 하고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아이가 반복적으로 이러한 역할놀이에 몰입하며 부모가 이를 제지하거나 경계설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발달상 변수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놀이치료 중인 PCIT(부모-자녀 상호작용 치료) 상황에서 아이가 이런 역할놀이를 보였다면, 치료자는 부모에게 단순히 중단하라고 지시하기보다는 “지금 이 놀이가 어떤 느낌이었을까? 아이가 엄마를 어떤 존재로 느끼고 있을까?”라는 탐색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모에게는 아이와의 경계 설정을 강화하되, 아이의 애착감과 자율감을 동시에 지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놀이 치료 현장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따뜻한 개입

 

놀이 치료 맥락에서 부모와 치료자가 함께 할 수 있는 몇 가지 따뜻한 개입 방향을 제안한다.

 

첫째, 아이의 놀이 언어를 경청하자. 아이가 “여보”라고 부르며 어떤 감정이나 역할을 흉내 내고 있는지, 엄마가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를 관찰하자. 그리고 엄마가 감정적으로 어떻게 느꼈는지,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다고 느끼는지 스스로 성찰해보는 시간이 중요하다.

 

둘째, 경계를 부드럽게 재설정하자. 부모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에서 친구처럼도, 배우자처럼도 아닌 엄마와 아들이라는 특별한 관계”라는 메시지를 놀이 속에서 전달할 수 있다. 예컨대, “지금은 아들이 엄마 장난감 역할 할 차례야. 엄마가 너를 ‘아들’로서 사랑해줄 차례야.” 같은 말로 아이가 ‘아들 역할’을 즐기도록 유도할 수 있다.

 

셋째, 아이에게 유아다운 놀이와 역할탐색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자. 아이가 또래나 인형놀이, 부모와의 역할놀이에서 ‘아이’라는 역할로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도록 놀이 시간을 마련해주자. 이렇게 하면 아이는 내부적으로 “나는 그냥 아이다”라는 정체감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부모와의 관계를 탐색할 여지를 갖는다.

 

넷째, 부모 자신도 자신의 정서와 기대를 들여다보자. 부모가 아이를 ‘친구’나 ‘작은 배우자’처럼 대하고 있었다면, 그 배경에는 외로움·부부갈등·역할혼란 등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부모-자녀 경계가 흐려지는 가족체계 속에서는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정서적 지원자가 되거나 역할을 대신하기 쉽다. 부모가 전문 상담이나 부모역할훈련을 통해 자신의 역할과 감정, 관계 패턴을 돌아보면 아이와의 관계 설정이 한결 건강해질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놀이 치료와 부모 개입이 함께 이루어질 때, 아이는 “엄마는 엄마이고 나는 아들이다”라는 안정된 관계 틀 안에서 탐색하며, 동시에 엄마와의 친밀감-안전감도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아이의 건강한 자율성과 정서발달을 위한 든든한 밑거름이 된다.


 

역할 혼동을 넘어 진정한 ‘우리’로

 

아이의 표현은 종종 장난처럼, 어색해 보일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의미가 있다. 37개월 유아가 엄마의 가슴을 만지고 “여보”라고 부르는 놀이도 그저 충동이나 호기심이라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시험하고 탐색하는 신호일 수 있다. 우리는 이 신호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이해하고, 경계를 설정하며, 아이가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 “엄마와 나는 어떤 관계인가”를 깨닫도록 돕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 칼럼을 읽는 부모나 치료자에게 제언하고 싶다. 아이의 몸짓과 언어 뒤에 숨은 마음을 들여다보라. 놀이 속 역할 혼동은 그저 혼란이 아니라 변화의 흐름이자 성장 가능성이 깃든 순간이다. 부모-아이 관계의 중심을 ‘부모와 아이’로 되돌리고, 놀이와 상호작용을 통해 경계는 분명히 하되 관계는 따뜻하게 유지하라. 이 과정이 아이에게 안정감과 자율감을 동시에 안겨줄 것이다.

 

끝으로,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제안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어떤 관계인가?”라는 작은 질문을 던져보라. 그리고 다음 놀이가 시작될 때, 그 질문을 품고 함께 웃고 탐색하라. 비록 혼란스러워 보이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아이가 자라기 위한 든든한 신호가 담겨 있다.

작성 2025.10.25 20:27 수정 2025.10.25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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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