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지 않는 시작선: 왜 조기평가가 중요한가
생후 12개월 무렵, 대부분의 아이는 부모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손짓이나 소리를 통해 자신의 세상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일부 아이들은 이 ‘공유의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부모가 이름을 불러도 반응하지 않거나, 눈을 맞추기보다 회전하는 장난감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발달의 개성’일 수도 있지만, 자폐스펙트럼장애(ASD)의 조기 징후일 가능성이 있다.
미국 국립정신보건원(NIMH)과 보스턴 아동병원의 대규모 연구(Ozonoff et al., JCPP, 2015; Kim et al., JAACAP, 2018)는 생후 14개월만 되어도 사회적 주의력과 공동주의(joint attention)의 발달 차이가 ASD 위험을 예측하는 핵심 지표임을 밝혔다. 즉, “조기평가”는 단지 진단의 이름을 붙이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아이의 뇌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이해하는 첫 단추다.
세계가 공감한 기준: 과학으로 본 조기 진단의 안정성
최근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Child and Adolescent Psychiatry에 게재된 김소현 외(2018)의 연구에 따르면, 24개월 이전의 조기평가에서도 약 85~90%의 진단 안정성이 유지된다. 이는 “너무 어려서 진단이 불가능하다”는 오래된 오해를 뒤집은 결과다.
또한 Chawarska et al. (2009), Lord et al. (2018) 등의 연구에서는, ADOS-2 Toddler Module(12~30개월용)이 임상적 판단과 병행될 때 높은 민감도와 특이도를 보인다고 보고했다. 이 도구는 언어가 제한적인 영유아에게 ‘놀이’와 ‘모방’을 통해 사회적 반응성을 평가한다. 즉, 검사실은 아이에게 “시험장”이 아니라 “관찰의 놀이터”가 되는 셈이다.
부모가 만드는 변화: 근거기반 중재의 핵심, 함께 배우는 시간
자폐 조기개입 연구의 방향은 이제 한 가지 결론으로 모이고 있다. “치료실이 아니라, 가정의 거실에서 시작되는 개입이 가장 오래 간다.” Koegel et al. (1982), Dawson et al. (2010), Green et al. (2010, Lancet)은 부모-시행 조기중재(Parent-Implemented Early Intervention)가 치료자 주도형보다 기술의 일반화와 유지에 더 효과적임을 입증했다.
이를 대표하는 모델이 바로 NDBI(Naturalistic Developmental Behavioral Intervention)과 그 하위 프로그램인 ESDM(Early Start Denver Model)이다. 이 접근은 행동주의와 발달심리를 통합해, 놀이 속에서 아이의 리드(lead)를 따르고,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사회적 학습을 유도한다.
예컨대 아이가 공을 굴리면, 치료자는 “한 번 더!”라고 반응하며 순서를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강화한다. 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사회적 두뇌를 자극하는 신경학적 훈련이기도 하다(Dawson et al., Pediatrics, 2010).
조기평가가 바꾸는 미래: 데이터가 말하는 ‘가능성의 곡선’
조기개입이 가져오는 변화는 실로 놀랍다. 김소현(2025)의 연구팀이 미국 MIRA 컨소시엄 데이터(n=1,133)를 분석한 결과, 조기중재에 참여한 영유아의 70% 이상이 3세 이전에 문장 수준의 언어를 습득했고, 인지 및 적응기능 점수가 유의하게 향상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상호작용 전략(예: 아이의 선택을 따르기, 사회적 미소에 반응하기)이 가장 큰 예측 요인으로 작용했다(Swain et al., JAACAP, 2024).
또한 Anderson et al. (2007, 2014)은 3세 이전 개입 아동이 학령기에 또래 관계 형성 능력과 독립적 일상 수행에서 우수한 결과를 보였다고 보고했다. 즉, 조기평가는 단순한 진단의 선행이 아니라, 아이가 평생을 살아갈 학습의 기초를 세우는 ‘뇌의 골든타임’에 대한 개입이다.
조기평가의 핵심은 ‘정답 찾기’가 아니라 ‘관계 시작하기’
자폐스펙트럼장애의 조기평가는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의 발달 궤도를 이해하고, 가족이 함께 성장할 방향을 찾는 여정이다. 세계보건기구(WHO, 2023)는 “자폐는 질병이 아니라 신경다양성의 한 형태이며, 조기평가의 목적은 진단이 아니라 지원”이라고 명시했다.
조기평가와 개입은 아이의 가능성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통로를 넓히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니 부모에게 전하고 싶다. “이건 아이의 약점이 아니라, 세상과 만나기 위한 또 다른 언어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는 놀이터에서, 부엌 식탁에서, 잠자리 이야기 속에서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