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월의 마지막, 공기가 차가워지면 우리는 500여 년 전, 한 수도사가 교회의 문에 붙였던 격문(檄文)을 기억한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와 95개의 반박문. 역사는 이 사건을 '종교개혁'이라 부른다.
우리는 종교개혁을 부패한 권력에 대한 저항, 면죄부라는 비상식에 대한 항거, 혹은 '오직'이라는 수식어로 대표되는 교리의 재정립으로 이해하곤 한다. 이 모든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단순히 낡고 부패한 종교 시스템을 허물고 새로운 시스템을 세운 '종교 리모델링'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격렬한 외침의 가장 깊은 곳, 그 핵심에는 한 인간 영혼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죄인인 나는,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있는가?"
이것은 500년 전 한 수도사의 질문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 영혼의 심연에서 울려 나오는 실존적 물음이다. 오늘 종교개혁 주간을 맞아, 우리는 화석화된 역사가 아닌,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이 절박한 질문 앞에 다시 서야 한다. "나는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종교개혁 직전의 중세는 '두려움'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구원은 저 높은 탑과 같아서, 인간은 자신의 공로와 선행, 고행이라는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려야만 겨우 그 끝에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성경의 권면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하기 위해 평생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공포의 채찍이 되었다.
그 누구보다 이 구원의 탑을 처절하게 오르려 했던 이가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바쳤다. 혹독한 금식과 철야 기도,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의 고행, 그리고 자신의 죄를 남김없이 쏟아내는 고해성사. 그는 너무나 자주, 너무나 집요하게 고해성사를 하여, 담당 신부가 "제발 죄를 좀 모아서 한꺼번에 가져오라"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는 왜 이토록 자신을 몰아붙였을까? 그의 영혼을 붙잡고 있던 단 하나의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로마서 1장 17절의 구절 때문이었다.
당시, 그에게 '하나님의 의(義)'는 죄인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요, 심판의 기준이었다. 그는 그 완벽하고 거룩한 기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인지를 뼛속까지 절감했다. 그는 훗날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죄인을 심판하시는 그 의로운 하나님을 증오했다"고 기록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완벽한 탑 앞에서 절망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선행을 쌓아도 그 기준에는 단 한 뼘도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오르면 오를수록 자신이 얼마나 바닥에 가까운지를 깨달을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행위'와 '공로'로 하나님 앞에 서려 하는 모든 영혼이 마주하는 절망의 실체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탑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운명처럼 다시 로마서 1장 17절을 묵상하고 있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로 그 순간, 성령께서 그의 영혼의 눈을 여셨다. 그는 거대한 진리 앞에 전율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심판의 기준(Active Righteousness)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하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로움(Passive Righteousness)이었다.
그것은 내가 성취해야 할 의가 아니라, 내가 받아들여야 할 의였다.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 내가 결코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그분이 나에게 거저 입혀주신다는 것(轉嫁). 이것이 '복음'이었다.
루터는 이 순간을 "나는 비로소 새로 태어나는 것 같았고,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그를 짓누르던 '하나님의 의'가, 이제 그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 순간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행위와 공로라는 썩은 동아줄을 붙잡지 않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붙잡았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이 종교개혁의 심장이다. 구원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Sola Gratia)이다. 그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Solus Christus) 주어지며, 우리는 그것을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받을 뿐이다.
500년이 흐른 오늘, 우리는 더 이상 구원을 위해 면죄부를 사지도 않고, 루터처럼 고행을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오늘 우리 안에는 교묘하게 변형된 '현대판 면죄부'가 없는가?"
여기 누구보다 열심 있는 한 성도가 있다. 새벽기도, 주일 성수, 십일조, 교회 봉사.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모범적인 신앙인'이다. 모든 이가 그의 경건함을 칭찬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눈물로 고백한다. "저는 하나님이 너무 무섭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구원받기 위해서', 혹시라도 지옥에 갈까 봐 두려워서 했습니다. 만약 제가 이것들 중 하나라도 빠뜨리면 하나님이 저를 버리실 것만 같습니다. 저는 제 마음속의 위선을 압니다. 저는 너무 지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의 '행위 구원'이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적 열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공로로 착각한다. 우리의 '선행'과 '헌신', 심지어 세상의 '성공'과 '부'마저도 나의 의로움을 증명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 즉 현대판 면죄부로 삼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무너지는 날, 나의 경건과 선행과 성공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복음은 너무 강력하다.
복음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What I have done?)’를 묻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느냐?(What He has done?)’를 선포한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기에, 그 감당할 수 없는 은혜에 감사하여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이 순서가 뒤바뀌는 순간, 복음은 다시 율법이 되고 만다.
종교개혁의 구호 중 하나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이것은 교회의 제도나 건물을 바꾸라는 구호가 아니다. 바로 오늘, '나' 자신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외침이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교묘하게 쌓아 올린 '나의 의'라는 탑을 무너뜨려야 한다. '나의 공로'를 자랑하려는 그 교만을 매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개혁은 500년 전에 끝난 이벤트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 나의 심장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현재적 사건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붙잡고, 그 은혜로만 살아내는 것. 이것이 우리가 다시 서야 할 유일한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