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리를 걷다 보면 광고판 속 반라의 이미지가 당연하게 스쳐 지나가고, 뉴스 속에서는 살인과 폭력이 일상의 일부처럼 반복된다. SNS 속, ‘좋아요!’라는 댓글은 타인의 고통마저 상품화한다. 우리는 세상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정말 세상이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 마음이 먼저 얼어붙은 건 아닐까?
이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보고 계실까? 2천 년 전,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시며 사랑과 진리를 가르치셨던 그분이, 지금 우리의 이 삭막하고 혼탁한 세상을 보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
세상과 교회를 뒤덮은 냉기
우리는 '놀랍도록 발전했다'라고 자부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놀랍도록 타락했다'라는 탄식을 금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동성애는 '성적 지향'이라는 이름으로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되었고,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는 위태롭게 흔들린다. 냉랭하고 삭막한 사회 속에서 이웃에 관한 관심은 사치가 되었고, '나'만을 위한 삶이 미덕처럼 여겨진다. 뉴스의 머리기사는 날마다 끔찍한 살인과 범죄 소식으로 가득하며, 생명의 존엄성은 벼랑 끝에 내몰렸다.
이 냉기는 세상의 문턱에서 멈추지 않고, 교회의 문 안까지 깊숙이 스며들었다. 예배당의 풍경은 어떤가? 뜨거운 기도는 점점 사라져 가고, 찬양은 입술에만 맴돌며, 거룩한 예배는 형식적인 일과처럼 변했다. 악기 소리는 웅장하고, 조명은 화려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과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마음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신명기 6:5)라고 하셨지만, 우리의 예배는 이성적 분석과 논리적 이해에 머물러 감성적 고백과 영적 충만함을 잃어버렸다. 예배는 더 이상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아니라, 잘 짜인 한 편의 공연처럼 느껴진다. 예수님은 이 냉랭한 예배를 보며 분명히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는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태복음 15:8).
삶으로 증명되지 못하는 신앙
세상과 교회가 이토록 차갑게 식어버린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삶으로 증명되지 못하는 기독교인의 신앙’에 있다. 우리는 입술로는 예수를 시인하지만, 삶으로는 예수를 부인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마태복음 5:13-14)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빛을 잃고 맛을 잃은 채, 세상 속에서 무능력하게 표류하고 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라는 말씀을 암송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자기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나약함과 죄악을 인정하고 회개하기보다는, 얄팍한 논리로 자신을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데 급급하다.
더욱이 누구보다도 삶으로 본을 보여야 할 지도자들의 타락은 교회의 위상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재정과 성적 타락에 연루된 지도자들의 뉴스가 보도되면서, 이는 교회 전체에 대한 불신과 비난으로 이어진다.
성경은 "거룩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5)라고 가르치지만, 우리의 지도자는 과연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가? 정도에서 비껴난 이들의 행동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행위이다.
지금 지도자들이 가진 기득권과 권력은 어디까지 악용될 것인가?
지금 이 시대는 정보가 넘치고, 권위는 무너지고 있으며, 대중은 점점 더 냉소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여전히 소수의 ‘지도자'라 불리는 이들은 압도적인 권력과 기득권을 쥐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권력이 공공의 선을 위해 사용되기보다는, 점점 더 철저하게 '자기 보호'와 '영역 확대'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권력은 언제나 시험이었다. 다윗도, 솔로몬도, 심지어 바벨론 왕도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히 그 권력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지도자들은 그 무게를 느끼기보다는, 그 권력 위에 더 편안히 앉는 방법만을 찾아다닌다. 그리하여 부당한 혜택, 무소불위의 결정권, 책임 회피의 장치는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권력의 악용은 대개 작은 침묵에서 시작된다. 거짓이 묵인되고, 탐욕이 합리화되며, 정의는 ‘더 나중의 일’로 밀려난다. 그런 흐름 속에서 지도자들은 점점 사람들 위에 올라서며, 마치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고 도덕의 중심인 양 군림하게 된다. 그 결과, 사회는 점점 더 불평등해지고, 약자들은 목소리를 잃고, 공동체는 조용히 붕괴하고 있다.
하나님은 권력을 주실 때 늘 그것이 ‘섬김’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가장 큰 자가 가장 낮은 자의 발을 씻는 모습으로 본을 보이셨다. 그러나, 오늘날 지도자 중 얼마나 많은 이가 그 발 아래 무릎을 꿇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오히려, 권력은 보호막이 되고, 기득권은 특권이 되어, 모든 비판과 책임을 튕겨내는 방패로만 사용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들을 향한 분노에 머무르지 말고, 동시에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 권력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기중심적 권세가 아니라 섬김의 책임을 감당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들의 마음을 찌르도록, 진리의 빛이 그들의 판단을 비추도록, 그들이 다시 국민 앞에,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도록 우리는 간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도자가 바로 서야 우리 민족도, 우리 교회도 회복되기 때문이다.

떠나는 다음 세대와 외면 당하는 영혼들
이처럼 신앙이 삶으로 증명되지 못할 때, 비극적인 결과들을 보게 된다.
첫째,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고 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신앙의 교리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거나 교회 의식에 거리감을 느끼기 때문이 절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위선과 모순을 보고 실망하는 것이다. "사랑"을 외치지만, 정작 사랑이 없고, "정의"를 말하지만, 불의에 눈감으며, "진리"를 강조하지만, 삶으로 진리를 증거하지 못하는 교회를 보며 냉정하게 등을 돌린다. 그들은 우리에게 진정성을 원하고, 투명성을 요구하며, 위선 없는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둘째, 세상 속 상처 받은 영혼들이 외면 당하고 있다.
동성애, 낙태, 자살, 젠더 이슈 등 복잡한 문제 속에서 혼란과 외로움에 빠진 이들에게, 교회는 진리와 사랑을 전하는 대신 판단과 배척으로 응답할 때가 많았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주셨지만,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가 진정으로 그들 곁에 서 있으려고 애쓰고 있는가?
교회 문턱에서 머뭇거리는 이들을 향해, 우리는 진심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태복음 11:28)라고 외치고 있는가?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실까?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실까? 아마도 그분은 우리의 죄악을 꾸짖으시기 전에, 먼저 깊은 슬픔과 아픔으로 우리를 바라보실 것이다. 그리고 회복을 위한 처방을 내려주실 것이다.
첫째, 회개를 촉구하실 것이다.
겉치레뿐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실 것이다. “너희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4:17)라는 그분의 첫 메시지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명령이다.
둘째, 사랑을 명령하실 것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요한복음 13:35). 우리의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를 섬기고 희생하는 사랑이어야 한다.
셋째, 다시 일어서라 격려하실 것이다.
비록 우리가 죄 많고 연약할지라도, 그분의 사랑은 절대 변치 않음을 상기시켜 주실 것이다. 우리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때, 좌절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며 함께 걸어 주실 것이다.
이 모든 비판과 처방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은 아닌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지 않은가?’ 타인의 타락을 보며 손가락질하기 전에,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할 때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라는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응답할 차례이다.
지금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의 예배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우리의 삶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는가? 우리의 교회는 과연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있는가?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시선을 세상에서 돌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한다. 그분의 희생과 사랑을 다시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그것만이 이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며,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다.
예수님은 이런 위선을 아시는가?
당연히 알고, 보고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위선을 아신다.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는 겉으로는 의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복음 23:28)라고 분노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오셨다. 그렇기에 지금도 그분의 시선은 가장 추하고 더러운 곳, 바로 우리 마음의 중심에 머물러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