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대 칼럼] 이젠, 전태일과 화해하고 싶다

문용대

나는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직장 생활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힘들었지만, 그걸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도 육영수 여사 서거,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 나는 깊은 슬픔과 허망함에 잠겼다. 돌이켜보면, 1987년 민주화 열풍이 몰아치기 전부터 나는 우파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왔던 것 같다.

 

1987년, 대한민국은 거대한 용광로와 같았다. 끓어오르는 민주화의 열망과 그를 억누르려는 권위주의 정부의 대립, 그리고 그 사이에서 격동하는 사회의 다양한 단면들이 매일같이 터져 나왔다. 2018년 초 극장가에는 지난해 12월 개봉한 ‘1987’이라는 영화가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연초부터 ‘신과 함께-죄와 벌’을 누르고 누적 관객수 1위를 달리며 5백만 명을 훌쩍 넘어섰고, 곧 1,000만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1987’이라는 영화 개봉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의 머릿속은 악몽이 되살아난 듯 아득해졌다.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시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증이 일었다. 영화 속의 1987년은 내가 직접 겪었던 그 해와 어떻게 다를까. 그리고 그 당시의 처절했던 상황을 글로 남기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어느 날, 홀로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 안은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의 눈빛은 나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듯했다.  

 

영화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던 중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황당한 발표는 전 국민의 공분을 샀고, 이는 들불처럼 번지는 반정부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후 이른바 ‘4.13 호헌선언’이 발표되면서 대학가에서 일기 시작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6월 초에는 연세대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군이 결국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분노는 극에 달했다.

 

스크린 속에서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의 함성, 날아다니는 화염병, 그리고 매캐한 최루탄 가스는 마치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생생하게 다가왔다. 드디어 6.29 선언으로 국민투표를 거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확정되었지만, 민주화 욕구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사회 각계에서 봇물 터지듯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분출했고, 이는 곧 전국적인 노사분규로 이어졌다. 노사대립은 농성과 파업, 기물파괴와 방화로 격렬하게 확산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월에는 경남 거제 대우조선 근로자 이석규 군이 시위 도중 사망하면서 시위는 더욱 과격해졌다. 12월 대통령 선거와 이듬해 개최된 88 서울올림픽으로 분규가 잠잠해진 듯했으나,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의 방북으로 인하여 사회 분위기는 혼미 상태가 계속되었다. 문 목사가 귀환 길에 두른 빨간 머플러는 전국 노사분규 현장에서 전체가 매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복잡한 심경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1987년은 분명 역사적인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겪은 1987년은 영화 속 그 격동의 현장과는 또 다른, 처절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나의 1987년은 거리의 함성보다는 공장 안의 비명으로 기억되었다.

 

악몽의 전쟁터, 대일중공업

 

나는 1987년 경남 창원 대일중공업에서 인사담당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내 나이 4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중간 관리자로서 상당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일했던 대일중공업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이 회사는 1968년 법인화된 대일산업에서 시작되었다. 1974년에는 경기도 구리에서 창원 국가산업단지 초기 조성과 함께 이곳으로 이전해왔다. 그리고 1981년, 비상장 기업이었던 대일산업은 당시 상장 기업이던 태양기계를 인수합병하며 대일중공업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도약했다. 이 합병은 업계의 큰 주목을 받았고, 우리 회사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대일중공업은 관리본부와 4개의 거대한 공장, 그리고 자체 기술개발연구소를 갖춘 명실상부한 대기업이었다. 총 5,400여 명의 종업원이 일하는 거대한 조직이었는데, 그중 1,200여 명은 국가의 중요 산업 시설에 일하는 조건으로 병역을 면제받는 병역특례요원이었다. 그들은 대일중공업의 방위산업 분야와 정부 기간산업 분야, 그리고 연구 분야에 배치되었다. 또한 독일, 일본 등 외국인 핵심기술요원도 50여 명에 달했다. 정부로부터 정밀기술 1급 공장으로 지정받을 만큼 기술력을 인정받았고, 4개 공장에서는 공작기계와 방위산업 제품, 그리고 자동차 부품을 생산했다. 여기에 별도의 열처리 및 착색 공장, 단조 공장까지 갖춘 종합 금속제품 제조업체로서, 한국 중공업의 심장부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나는 인사담당 과장으로서 이러한 회사의 성장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특히 병역특례요원들의 선발과 배치 업무는 나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나는 직접 전국 기계공고, 공고, 직업훈련원은 물론, 공대, 공전 등을 찾아다니며 우수한 인재들을 발굴했다. 그들을 회사 기숙사에 입주시키고 일정 기간 교육을 거쳐 현업 부서에 배치하는 일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10대 후반부터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풋풋하고 순진한 젊은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선배이자 형처럼 느껴졌고, 그들의 땀과 열정이 모여 회사의 발전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었다.

 

노동 운동의 파도와 나의 상흔

 

우리 대일중공업은 1979년 10.26 사태 이후 어수선하던 1980년부터 이미 많은 노사분규를 겪고 있었다. 창원, 마산, 부산, 울산, 거제 등 대규모 사업장이 밀집한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노사분규가 끊이지 않았는데, 우리 회사는 그중에서도 단연 중심에 있었다. 당시의 분규는 단순한 임금 인상이나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투쟁이라기보다는, 학생들까지 합세한 정치 투쟁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창원 마산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산업 현장이 그랬다.

 

그 중심에는 강태우(당시 노조위원장)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스무 살 무렵, 전태일의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있다면…"이라는 일기장 속 글을 읽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될 결심을 했던듯하다. 대졸 학력을 숨긴 채 영등포 직업훈련소에서 선반 자격증을 따 위장 취업한 그는, 대일중공업 노조를 장악했다. 나는 그를 보며 전태일에게까지 미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는 직원들의 고충을 듣고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노조 집행부의 선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밤새도록 대자보를 써 붙였고, 확성기를 통해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나는 몇 차례 그들의 대자보에 ‘회사 측 어용 인사’, ‘노동자 탄압의 주범’이라며 이름이 올랐다.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무거웠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가족들의 안전을 염려해야 했다.

 

그들은 시위 때면 늘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불렀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아~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꽃다운 이내 청춘’. 애절한 가사나 선율이 감수성 예민한 젊은이들을 충분히 자극할 만 했다. 하도 들어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 지기도 했다. 요즈음 내가 나가는 교회 찬양대에서 가끔 그 노래 가사를 고쳐 부른다. 그때마다 다 아는 곡이지만 나는 악몽이 되살아나 입이 열리지 않는다.

 

시위대 집행부는 현수막, 리본, 머리띠 등에 적힌 구호 문구, 바탕색이나 글체, 글자색, 민첩한 행동 등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누군가의 지령을 받고 있음이 확실해 보였다. 공안 당국의 지침대로 따라야 하는 회사는 속수무책일 뿐, 노조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우리는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도, 동시에 노조의 격렬한 시위에 대응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내가 직접 전국 기계공고 등을 다니며 선발했던 그들이었다. 풋풋했던 젊은 그들은 어느새 눈빛에 광기를 띠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내가 일하는 본관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며 쓰레기통을 발로 차고, 내 책상 유리를 우산으로 깨부수는 일을 당할 때는 비애를 느끼기까지 했다. 정성껏 키워낸 자식들이 돌변하여 부모에게 칼을 겨누는 듯한 배신감과 무력감에 나는 종종 사무실에 홀로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는 더욱 과격해졌다. 회사 정문과 후문은 노동자들에게 완전히 점령당했고, 우리는 회사 안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직원들은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고, 화장실조차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본관을 점거한 채 관리직 근로자들과 충돌했고, 쇠파이프와 몽둥이가 난무하는 가운데 수많은 인원이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참혹한 광경이 수차례 벌어졌다.

 

회사 밖은 더욱 아수라장이었다. 문 밖에는 경찰과 노동자들이 대치하며 화염병과 최루탄 가스가 난무했다. 시위대의 화염병이 굉음을 내며 터지고, 건물 벽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최루탄 가스가 매캐하게 공기를 가득 채웠고, 눈과 목이 따가워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최루탄이 터질 때마다 나는 눈물을 쏟아냈다. 그 눈물이 단순히 최루탄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들이 달려야 할 창원대로에는 불붙은 폐유 드럼통이 수도 없이 뒹굴었다. 거대한 불기둥이 밤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매캐한 연기가 창원 시내를 뒤덮었다. 경찰과 노동자들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수년간 전쟁을 치렀다. 매일 아침 출근길은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었고, 퇴근길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깊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화염병 터지는 소리, 최루탄 터지는 소리, 그리고 시위대의 함성 소리에 시달렸다. 꿈속에서도 회사 건물은 불타고 있었고, 나는 그 불길 속에서 허우적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다다랐다. 나는 이십 년 가까이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그 일터를 미련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나의 40대 초반은 그렇게 뜨거운 불길 속에서 재가 되어버렸다.

 

불 꺼진 뒤 남은 상흔, 그리고 화해

 

대일중공업의 끊임없는 노사분규는 결국 회사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제때 부품을 공급받지 못하던 현대자동차 등 완성차 업체들은 더 이상 우리 회사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부품을 자체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지금의 현대모비스 같은 회사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회사의 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기업들의 성장의 발판이 된 것이다.

 

내가 회사를 떠난 뒤에도 대일중공업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1998년, 회사는 끝내 부도 처리되었고, 2003년에는 다른 업체로 넘어가 회사 이름마저 바뀌었다. 한때 5,400명이 넘던 종업원은 1,000명에도 훨씬 못 미친다고 하니, 4,400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그 뜨거운 용광로 같던 시절, 나는 그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 불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까.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된 1987년,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악몽이자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았다.

 

나는 평생 그들을 미워했다. 강태우와 그의 변호를 맡았던 민 변호사(웃날 유명 정치인이 됨). 그들은 내게 고통을 준 사람들이었다. 더 나아가, 노동 운동의 상징인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까지. 이소선 여사도 민 변호사처럼 대일중공업 시위 현장에 종종 찾아왔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의 방북으로 사회 분위기는 더욱 혼미해졌고, 노조원들은 문 목사가 방북 때 매고 온 빨간 머플러를 모두 매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노조원들이 부르던 '아침이슬' 같은 노래도 듣기 싫었다. 하지만 일흔 중반의 나이가 되어, 나는 다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전태일은 1948년생, 나는 그보다 두 살 아래다. 그는 열일곱에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일했다. 나 역시 열일곱에 서울로 와 평화시장 근처 을지로5가 방산문화사 인쇄소에서 일했다, 그곳은 선거철이나 연말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잠을 쫓으려 약을 먹고 며칠씩 밤을 새웠다. 한번은 약을 먹었는데 잠이 쏟아졌다. 방 아랫목에 팔을 베고 잠들었다 깨보니 팔뚝이 따갑고 부풀어 있었다. 살이 익은 상처는 지금도 거무스름한 자국으로 남아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신입사원이 잠 안 오는 약 대신 수면제를 잘못 사다 준 것이었다. 또 한 번은 동대문에서 신설동으로 걸으며 피곤에 지쳐 눈뜨고 꿈을 꾸다 전봇대에 부딪혔다. 그만큼 고생했지만, 그 시절은 보람되고 행복했다.

 

전태일과 나는 서로 알지는 못했지만, 지척인 거리에서 3년 가까이 지냈음을 알게 됐다. 내가 고통을 묵묵히 견뎠다면, 전태일은 그 고통을 바꾸려 몸부림쳤다. 그의 일기 속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있다면…”이라는 외침은 그의 절박한 외로움이었다. 강태우는 그 외침에 답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폭력과 혼란이 뒤따랐고 나는 그 속에서 상처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투쟁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망이었음을 이해하려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바보 대통령’이 전태일의 ‘바보회’와 겹쳐지며, 나는 그들의 진심을 다시 생각했다.

 

이제는 미움을 다 내려놓고 싶다. 전태일, 강태우, 이소선 여사, 그리고 그 시절의 나 자신과 화해하고 싶다. 나의 1987년은 악몽이었지만, 이젠 그 기억을 화해로 마무리하고 싶다. 전태일이 꿈꾼 세상은 어쩌면 나도 바랐던 세상이었다. 그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을까. 그 질문은 남아 있지만, 이젠 미움 대신 노래를 부르며 평화를 찾고 싶다. '늙은 군인의 노래'와 '아침이슬'이 아픈 기억이 아닌, 용서와 평화의 노래가 되기를 바란다.

 

 

[문용대]

‘한국수필’ 수필문학상 수상

‘문학고을’ 소설문학상 수상

‘지필문학’ 창립10주년기념 수필부문 대상 수상

‘한국예인문학, 지필문학, 대한문학, 문학고을’ 활동

‘대한문학 부회장’, ‘지필문학’ 이사

‘브레이크뉴스’ 오피니언 필진

수필집 [영원을 향한 선택]

[날개 작은 새도 높이 날 수 있다]

이메일 : myd1800@hanmail.net

 

작성 2025.10.30 08:49 수정 2025.10.3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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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