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늘 역사의 주인공
앞서 구당서 권199 上의 동이전 기사를 소개하며 이세민이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요주로 바꾸었다는 부분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삼국사에는 그 전투 이후 당 태종 이세민이 안시성을 공격하다 실패하고 도망가는 기사를 싣고 있다. 식량은 떨어지고 날이 추워져 남은 군사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겠지만, 군 병력도 대폭 죽어, 회군 길에 가로놓인 요택을 메꾸기 위하여 황제 스스로 등짐을 질 수밖에 없는 수모를 겪게 된다.
탁발선비 북위의 후예로 고작 38년 수명의 수나라를 뒤엎고 지배자가 되므로 기고만장하던 이세민에게 이 처절한 패배는 뼈저린 것이었다. 따라서 죽기 전에 전쟁을 극구 만류하던 위징을 떠올린다. 위징이 살았으면 이 무모한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처절하게 반성한다. 그러나 앞뒤 경과를 보면 반성이라기보다 유치한 자기변명의 다름이 아니다.
그 수치스러운 전쟁에서 이세민이 승전으로 얻은 곳이라고는 요동성뿐이었는데, 그 요동성만이 자신에게 유일하다시피 한 실적이었으니 그 승리에 취했을 당시, 그 전쟁 이전에는 요동성이었던 그곳을 ‘요주’로 바꾸었다. 그 지명은 몇 번에 걸친 지명 변경의 우여곡절을 겪지만, 신해혁명으로 건국한 중화민국까지 이어져 내려오다, 공산당의 몇 안 되는 항일전쟁의 승리를 안겨준 ‘좌권’이라는 전쟁영웅에게 바쳐지므로, 좌권이라는 지명으로 1942년에 바뀌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하여 광복만 생각할 때였고, 광복되었어도 바로 총부리를 마주 대었던 적국이며 ‘죽(竹)의 장막’이라 불리던 중공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 지명 변경을 알 수조차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천오백 년이라는 끈질긴 역사 조작질의 흉포에도 근래까지 이 요주가 건재함으로 올바른 역사를 복원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욱이 요동성이었다는 기록으로 왜곡된 역사관이 세뇌시키고 싶어하는 만주의 요동의 개념을 깨는 강력한 무기도 된다.
그 좌권이 ‘요(遼)’이었음을 새삼스럽게 오재성선생이 1980년대에 알아내므로 동양사를 전면적으로 다시 볼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이루어진다.
이 ‘요’가 중요한 이유는 너무도 많다. 그 첫 번째가, 스스로는 ‘하화족(夏華族)’으로 인식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자기들의 동쪽 변방에 사는 사람이라고 정의(定義)하는 소위 ‘동이(東夷)족’의 경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요(遼)라는 지명과 함께 존재해야 하는 요산(遼山)과 요수(遼水)가 실낱같더라도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동일 혈족들이 오가면서 늘 살고 있던 곳이라 요(遼)라는 지명이 결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 요(遼)라는 글이 갖는 기본 뜻은 ‘멀다’로, 흔히 ‘멀 요’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위 하화족의 첫 국가인 주(周)나라 도읍이 있던 서안 지역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천하관에서 이 요는 그들에게 가마득하게 먼 변방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는 지도가 소위 ‘우적도’로써, 그들의 학계가 연구한 고대지도와 그 지도를 비교하면 그들의 천하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게 되시리라.)
그들에게서 그렇게 멀던 영역이 한나라가 무제 때 영토 야욕이 무럭무럭 자라서 동과 서를 침략할 때, 한번 방심하여 빼앗겼던 지역을 그들은 계속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한번 발을 들여놓았던 지역은 그들의 영역이라는 해괴한 발상이었다. 분쟁이 지속되어도 그곳에 살던 일부 후손은 남아 눈치라도 보며 살게 되는 것이 사람의 삶이다. 그런 반면에 분쟁을 피하여 떠나는 분파는 서쪽 영역으로 진출하면서 유럽 쪽 역사를 소용돌이치게 만들고, 현재의 서쪽 지역의 인구분포 속에 훈족, 돌궐족, 몽골족의 유전자를 남겨놓게 된 것이다.
결국 세계역사를 흔들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던 그 주인공들은 ‘우리’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는 ‘고구리’의 연방 구성원들이던 혈족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잘못된 사관을 가르친 사학자들의 견해와 달리, ‘우리’는 늘 세계 역사의 중심을 이루는 주인공이었다.
수당과 고구리의 전쟁지역의 요수, 거란과 고리의 분쟁지역인 요하
앞의 “백제 역사로 확신하는 요동, 요서”의 글 끄트머리에 ‘요수’를 비롯한 사서에 등장하는 요 관련 지명 등의 숫자를 표로 제시한 적이 있다. 그 수치를 제시만 하고 그 수치가 갖는 의미를 논하지 않았다. 독자들에게 생각하여 보시라는 제안이었다.
그 수치 가운데, 독자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수치가 있을 것이다. 필자의 눈에도 정말 별스러워 추적해보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史實) 가운데 하나다. 지금 함께 떠나봅시다.
우선 “요수”가 후한서까지 한 건도 없고, 삼국지부터 등장하여 청사고까지 등장한다는 사실.
더 이상한 사실은 “요하”가 송사까지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더니 요사에서부터 갑자기 폭발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
필자의 해석은
수ㆍ당과 고구리의 경계지역에 요수가 있어 분쟁지역이 되었고,
고구리의 후예라며 거란과 고리가 다투었던 사실로 보아 옛 고구리 영역을 나누어 갖게 된 두 나라 사이에 요하가 있어 분쟁지역이 되므로 사서에 등장한다. 그러므로
① 요수와 요하는 명백하게 다른 강이다.
② 수당과 고구리의 전장이 되는 곳에 흐르는 강은 요수이며,
③ 거란(요)과 고리의 전장이 되는 곳은 요하이다.
④ 따라서 고구리와 고리의 영역은 아주 다른 영역이다.
다만 (왕건의) 고리가 개국 초부터 영역이 달랐었는지, 언제 고구리 서쪽 영역을 잃게 되었는지는 매우 깊이 연구해야 할 숙제이다. 즉 저 대륙의 물산이 풍부하던 지역을 차지하였던 삼국 영역을 신라와 후삼국을 거쳐 이어받았을 왕건의 고리다. 그 고리가 거란과의 전쟁을 겪으며 영토를 잃는 기록이 왜 어떻게 남아 있지 못하였을까? 어쨌든 고구리와 고리는 중심영역이 달랐다는 사실이 다른 요건을 검토하여도 확인된다. (발해가 고구리 영역의 계승자이고 발해 영역을 거란이 대부분 차지하였다 하더라도, 이 주제는 복합적이라 다음 기회로 넘길 수밖에 없다.)

요(遼)의 자료는 많으나 변조도 워낙 심하다
이 요수가 하북성에 걸쳐져 있다는 사실은 수경(水經, 水經注가 실질적으로 더 유명하나, 수경주의 신뢰는 매우 폄하되기도 한다)과 중공 대표 포탈사이트 백도(百度, 그들 발음은 바이두)에서 넉넉하게 확인된다.
먼저 수경과 수경주에 대하여 알아보면,
수경의 저자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설, 전한 때 상흠(桑欽)이라는 설, 서토의 삼국시대를 잇는 사마씨의 진(晉)나라 때 곽박(郭璞)이라는 설로 나뉘어 있다. 이 가운데 곽박 설이 가장 강력하다.
그 수경에 엄청난 량의 주해를 붙여서 책으로 출간한 사람은 진(晉)을 남쪽으로 밀어낸 위나라(魏, 훗날 北魏 또는 元魏)의 력도원(酈道元)이다. 수경주는 수경의 거의 10배 분량의 주해를 붙여, 수경의 실질적 저자는 력도원이라는 평까지 얻었다.
이 수경주는 하천의 구체적인 흐름, 지류의 분포 및 유역 내의 산천, 성읍, 역사 유적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또 많은 신화 전설, 풍토 민정 및 사회 변천을 기록하였다. 그 복잡한 정보가 오히려 난해함을 주는데, 지명이 변하여 난해한 것인지, 자연이 변하여 그 주해를 해석할 수 없는지 모른다. 따라서 수경주에 남겨진 수경의 원문만 연구대상으로 삼고, 수경주의 주해는 아예 무시하라고 극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가 볼 수 없는 문헌이 인용되는 등으로 대단히 귀중한 정보의 보고라고 평가된다.
수경주에는 1252개의 하천이 망라되어 있다. 지리와 관련 없는 전설 등도 포함되었지만, 당연하게 하천의 계통, 같은 류역의 하천의 묶음 등으로 체계를 갖추고 있다. 1,500이라는 많은 하천을 다루려면 분류체계가 논리적 합리성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필자가 주목하는 체계는 ‘같은 지역의 하천은 한 단원으로 묶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하북성에 존재하는 하천이라면 그 하천을 묶어야지, 엉뚱한 지역의 하천을 하북성 하천 모음에 묶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 지역 하천은 같은 묶음 속에 담을 것이라는 평범한 시각으로 보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잘라 말하자면 ‘요수(遼水)’가 있는 근처의 하천은 요수와 함께 묶여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상식이다.

요수(遼水)는 하북성에 존재하는 하천임을 증명
수경주 권14에는 濕餘水 沽河 鮑丘水 濡水 大遼水 小遼水 浿水가 등재되어 있다. 이들을 검색하여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소개할 수 없어, 필자가 대표적으로 생각하는 일부(百度로 검색한 정보의)만 제시하자면,
습여수(濕餘水)는 고대 문헌에서 지금의 북경 온유하(溫榆河)를 가리킨 명칭으로, 가장 이른 기록은 ‘한서(漢書)’에 보인다.
고수(沽水)는 고대에 화북 지역 다수 하천을 통칭한 이름으로, 그 명칭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고수(沽水)는 어양(漁陽) 새(塞) 밖에서 나오며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기록이 가장 이르다.
포구하(鮑丘河)는 하북성 흥륭현(興隆縣) 장군관(將軍關) 밖에서 발원하여 천진시 계주구(薊州區) 황애관(黃崖關)으로 들어오며, 계운하의 중요한 지류이다. 이 강은 고대에 “포구수(鮑邱水)”라 불렸고, 명대에는 “조하(潮河)”라는 별칭이 있었다.
유수(濡水)는 중국 고대에서 여러 수체를 통칭한 명칭으로, 주로 지금의 하북성 경내의 세 개 수계를 포함한다. 첫째는 ‘한서·지리지’ 탁군(涿郡) 고안현(故安縣) 기록의 濡水. 둘째는 ‘한서’ 중산국(中山國) 곡역현(曲逆縣)의 유수(濡水)로, 지금의 순평현(順平縣) 서부의 곡역하(曲逆河, 기하祁河). 셋째는 ‘한서·지리지’ 요서군(遼西郡) 비여현(肥如縣) 기록의 濡水.
대료수(大遼水)는 변경 밖 衛의 백평산에서 나와, 동남에서 변경으로 들어와, 료동 양평현 서쪽을 지난다. 또 동남으로 흐르면서 방현 서를 지난다.
소료수(小遼水)는 현토군 고구리현에 요산(遼山)이 있고, 소요수가 나오는 곳이다.
패수(浿水)는 락랑(군, 락랑국이 아니다) 루방현에서 나와, 남동쪽으로 림패현을 지난다.
모든 예문이 (기존 사학자의 시각으로 해석한다면) 단정적으로 하북성을 명시하지 않더라도 전체적으로 하북성에 존재한다는 확신을 갖기는 충분하다. 즉 요수는 大가 붙던 小가 붙던 하북성을 떠날 수 없다. (천하에 신뢰 불가능한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에도 유수를 현 난하로, 고수를 조백하로 그렸고, 현재 요하는 대요수, 혼하는 요수라 했지만 小는 못붙이고 ‘요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요녕성에 있는 요하는 절대로 요수와 혼동될 수 없음이 명백해진다.
요동을 산서와 하북 경계라고 못 박는 사기 권69 소진 렬전의 연(燕)나라 영역
서토인들이 지면에 펼치는 영토 확장 욕심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막장이 동북공정, 서남공정 등이지만 요(遼)를 넘어 동서남북으로 확장은 말문을 막는다. 그래서 요동을 만주로, 음산(陰山)산맥을 산서성 북쪽 및 하투 북쪽의 내몽골로, 또 연산(燕山)산맥을 하북성 북쪽으로 이동시켜 놓았다. 그 연(燕)의 영역을 가장 정확하게(? 지명이동으로 오해 소지는 엄청나지만) 못박은 사실(史實)은 사기 권69 소진 렬전에 기록되어 있다.
소진 렬전은 그의 현란한 말솜씨와 행적이 흥미진진하여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여기에서 그 행적을 소개하지 않는다. 전국시대에 무섭게 강력해지는 진(秦)나라에 유일한 대항 방법은 나머지 6국이 합종(合從)하여 하나가 되야한다고 소진은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주(周)나라, 진(秦)나라, 조(趙)나라에서 푸대접을 받다가, 드디어 연(燕)나라 문후(文侯)를 만나 다음과 같이 설득한다. (위치가 담긴 기사만 남겼다.)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嘑沱易水, 地方二千餘里 帯甲數十萬 車六百乗 騎六千匹 粟支數年.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북쪽으로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남쪽으로는 호타하(嘑沱河)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 땅은 사방 2천여 리에 갑옷을 두른 병사가 수십만, 전차가 600승, 전투마가 6,000필, 비축된 식량은 몇 년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남으로 갈석(碣石)과 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으로는 대추와 밤이 풍족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내려준 창고라는 것이지요.
夫燕之所以不犯冦被甲兵者, 以趙之為蔽其南也. 秦趙五戦, ~ 而王以全燕制其後, ~ 且夫秦之攻燕也, 踰雲中九原, 過代上谷 彌地數千里. ~ 今趙之攻燕也, ~ 渡嘑沱 渉易水 不至四五日而距國都矣. ~ 是故願大王與趙従親 天下為一 則燕國必無患矣.
연나라가 침범을 당하지 않고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은 조나라가 남쪽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秦)과 조가 다섯 번 싸우면 ~ 왕께서는 연나라를 온전하게 보존한 채 그 후방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 또 진이 연을 공격하려면 운중과 구원을 넘고 대군(代郡)과 상곡(上谷)을 지나는 수 천 리 땅을 뚫고 지나야 합니다. ~ 지금 조나라가 연을 공격한다면 ~ 호타하를 건너고 역수를 건너면 4, 5일 안에 도성에 이를 것입니다. ~ 따라서 대왕께서는 조나라와 연합하여 천하가 하나가 되면 연나라는 아무런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文侯曰:子言則可, 然吾國小, 西迫彊趙, 南近齊, ~
문후는 그대의 말이 옳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작은데다가 서쪽의 강력한 조나라가 압박하고 남쪽은 제나라와 가깝소. ~
위 앞의 원문에 단순하고 충실하게 방향만 보거나(아래 첫 번째 표), 원문과 현 지도에 나타나는 지명을 참고하고 연의 면적을 고려하면 다음(아래 두 번째 표)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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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호 루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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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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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중 구원 | ⇦ | 연 | ⇨ | 조선 요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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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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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수 호타 | 갈석(?) 안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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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호 안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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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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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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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
루번 |
| 연 |
| 갈석(?) 요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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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타 | 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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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7국 가운데 앞 기사에 등장하는 지명과, 그 다음 기사에 등장하는 네 나라의 방향을 넣어서 추정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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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
| 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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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중 | 대군 | 상곡 | 조선 |
| 루번 |
| 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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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
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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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수 호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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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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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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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소진렬전으로 보아도 연(燕)나라는 산서성을 거의 넘을 수 없으며, 요동은 연나라의 바로 동쪽에 붙어 있어야 한다. 하기는 담기양을 비롯한 제도권이며 어느 전통 사학자도 연나라를 역수와 호타하는 물론 소진 렬전에 등장하는 어느 지명과 연계를 맺을 수 없게 너무 동쪽으로 밀어놓았을 뿐, 연나라 동쪽에 요동을 붙여 놓은 사실은 신기하다. 요동 하나만 연나라 동쪽에 붙여두면, 다른 9곳 지명뿐만 아니라 영정(嬴政)의 진(秦)나라와 그렇게 멀리 떼어놓아도 괘념할 일이 아닌가 보다.
주제에 벗어나지만 사학자들의 무개념을 덤으로 하나 추가한다. 현재 북경 서북쪽에 상곡이 있었다고 악착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이 렬전에서 소진은 진나라가 서쪽 또는 북쪽에서 연을 침략하려면 (섬서성 서안 쪽에서 유림과 황하를 지나) “운중과 구원을 넘고, 대군과 상곡을 지나야 한다”고 하였다. 또 조나라에서 연을 공격하려면 호타하와 역수를 건너야 한다고 했으니, 먼쪽부터 연나라에 가까운 지명 순으로 언급한 것이다. 호타하와 역수가 귀띔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상곡은 산서성에 있는 지명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삼국사의 기사 하나를 덧붙이면, 상곡이 북경의 서북쪽에 있을 수 없음이 자명해진다. 즉 삼국사 권14 고구리본기 제2 모본왕 2년 조에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
고 하였으니, 상곡은 태원과 꽤나 가까운 곳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내용을 훗날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중공에 25사가 있어 량이 많아 자랑하지만 고작 200년 정도가 수명이 긴 나라 축에 속하고 심지어 몇 년에 불과한데다, 그 지배세력은 그들이 험악하게 깔보는 북방 종족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그 내용의 적합성은 천문기록으로 여지없이 폭로된다. 그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기사는 적지만 내용의 정확함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삼국사의 귀중함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