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 더웠냐는 듯, 찬 바람도 불고, 남은 마지막 잎이 흙으로 돌아가는 11월이다.
우리는 흔히 이 계절을 상실과 소멸의 시간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김종일 시인의 시, ‘11월, 뿌리를 더듬다’는 그 통념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 시는 11월을 '상실'이 아닌 '성숙'의 시간으로, '비움'이 아닌 '채움'을 위한 여백으로 재정의한다.
시는 "빛의 함성 멎은" 숲에서 시작한다. 열정적으로 타오르던 10월의 화려함이 모두 스러진 자리다. 잎은 흙으로 돌아가고, 숲은 텅 빈다.
하지만, 시인은 "비움은 상실 아닌 숨 고르는 여백"이라고 선언한다. 이는 1년 내내 쉼 없이 밖으로만 향했던 우리의 시선을 안으로 돌리게 하는 강력한 울림이다.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그 자리가, 실은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숨 고르기'의 공간임을 역설한다.
11월은 "화려함의 잔상"과 "순백의 예감" 사이에 서 있다.
뜨거웠던 가을과 모든 것을 덮을 겨울, 그 경계에 선 "무채색 캔버스"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의 핵심이 드러난다. "존재는 내면의 뿌리를 더듬는다." 잎과 꽃이라는 화려한 외피를 모두 덜어내고 앙상한 가지만이 남았을 때, 비로소 존재는 자신을 지탱하는 근원, 즉 '뿌리'를 향한다.
이는 11월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공감을 준다. 한 해 동안 성과와 치장, 관계의 소란 속에 매몰되었던 우리가, 이 앙상한 계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 '나를 지탱하는 힘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시인이 말하는 '뿌리를 더듬는' 행위는, 가장 솔직하고 본질적인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성숙한 과정이다.
놀라운 것은 이 고요한 성찰이 절망이 아닌 희망을 잉태한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이 성숙한 고요 속에서만 / 첫눈 그리는 설렘 싹트고"라고 노래한다.
모든 것을 비워낸 바로 그 무채색 캔버스 위에, 가장 순수한 '첫눈'에 대한 설렘이 싹트는 것이다.
또한, "한 해의 소란이 맑은 울림 된다"라는 구절은 우리 마음에 맺혔던 응어리를 풀어준다. 시끄럽기만 했던 1년의 소음들이 이 고요한 침전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의미 있는 '울림', 즉 삶의 교훈과 깨달음으로 승화한다.
이 시는 11월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이자, 지혜이다.
이 계절의 비움과 고요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지금이야말로 덧없는 잎을 미련 없이 떨구고, 자신만의 단단한 뿌리를 더듬어 볼 최적의 시간이다. 1년의 소란을 '맑은 울림'으로 바꾸어낼 이 성숙한 고요를 기꺼이 환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