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사랑의 노래

이태상

노래와 영화는 물론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흔하디흔한 게 사랑타령이지만 우리 진지하게 뭐가 진정한 사랑인지를 잘 보여주는 두 사례를 들어보자. 하나는 칼릴 지브란의 ‘방랑자’에 나오는 ‘사랑의 노래’이다.

 

언젠가 한 시인이 사랑의 노래란 시를 짓고 보니 아름다웠다. 그는 이 시를 복사해서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보냈다. 심지어는 그가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먼 산 넘어 사는 아가씨에게도 보냈다. 며칠 지나 이 아가씨의 편지를 갖고 사람이 찾아왔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보내주신 사랑 노래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서 오셔서 제 부모님을 만나 혼사를 준비해주셔요.”

 

이 편지에 시인이 답하기를 

 

“친구여, 내가 보낸 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모든 여자들에게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가 시상으로 떠오른 걸 내가 그냥 한 번 적어본 것일 뿐이라오.”

 

아가씨는 다시 편지하기를 

 

“위선자, 거짓말쟁이! 난 이날로부터 나 죽는 날까지 당신 때문에 모든 시인을 미워하고 저주할래요.”

 

또 하나는 오늘 아침 친구로부터 전달받은 ‘잊지 못할 주례사’라는 글이다. 

 

친한 대학 선배의 결혼식이었습니다. 여느 결혼식처럼 잘 어울리는 신랑 신부의 모습에 부러움이 가득한 축하의 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간 친구에게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배 집의 엄청난 반대 때문에 결혼하기까지 우여곡절이 정말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부는 정말 천사처럼 아름답고 단아해 보였습니다.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결혼식 주례 선생님은 저의 대학 은사이자, 선배의 은사이기도 한 분이셨습니다. 이윽고 주례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제 대머리를 딱 한 자로 표현하면 한문으로 빛 광光, 즉 광光이라고 할 수 있지요. 신랑 신부가 백년해로하려면 광光나는 말을 아끼지 말고 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세 치 혀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보, 사랑해. 당신이 최고야라는 광光나는 말은 검은 머리가 대머리가 될 때까지 계속해도 좋은 겁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얀 장갑을 낀 선배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선배는 신부에게 수화로 주례 내용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간, 좀 전 친구의 이야기에서 반대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은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주례사를 마치셨습니다.

 

“여기,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신랑이 가장 아름다운 신부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군자는 행위로써 말하고 소인은 혀로써 말한다고 합니다. 오늘 저는 혀로써 말하고 있고 신랑은 행위로써 말하고 있습니다. 신랑 신부 모두 군자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두 군자님의 인생에 축복이 가득하길 빌면서 이만 소인의 주례를 마칩니다.”

 

예식장은 하객들의 박수 소리에 떠나갈 듯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들리도록 표현하고, 들리지 않으면 보이도록 표현하면 됩니다. 마음으로 표현하면 더 잘 들리고 잘 보이는 것이 사랑이랍니다.

 

자, 우리 이제 송강 정철과 기생 강아의 ‘사랑의 노래’를 들어보자.

 

조선시대 전라도 기녀인 진옥은 파란 많은 인생을 살다 간 송강 정철로 인해 이 시대에 기억되는 여인이다. 원래 이름은 ‘진옥’이었으나 정철의 호인 송강의 ‘강’자를 따라 강아라고 불렸다. 강아는 시조문학에 있어 ‘송강첩’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시조 문헌 중에 누구의 첩이라고 기록된 것은 오직 강아 뿐이다. 대개는 기녀가 속한 지명을 따라 ‘남원명기’ ‘평안기’ 등 기명을 적었으나, 강아는 기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송강첩으로 기록돼 있다. 

 

분명 이러한 기록은 송강의 명성과 지위 때문에 획득된 것이리라 생각되는데, 이를 반추해 보아도 송강 정철과 강아의 사연이 당시 사람들 기억 속에 남다른 의미로 남아 있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전라도 관찰사로 등용된 정철은 전라 감영에 있을 때 노기들의 청을 들어서 당시 동기였던 강아를 처음 만나게 된다. 불과 십여 세 남짓의 어린 소녀였던 강아에게 머리를 얹어 주고 하룻밤을 같이했으나 청렴결백했던 정철은 어린 강아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다만 명예로운 첫 서방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정철의 인간다움에 반한 강아는 어린 마음에도 그가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정철 또한 어리지만 영리한 강아를 마음으로 사랑하며 한가할 때면 강아를 앉혀 놓고 틈틈이 자신이 지은 사미인곡을 외어 주고 장진주 가사를 가르쳐 주며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강아는 기백이 넘치고 꼿꼿한 정철에게서 다정한 사랑을 받으며 그를 마음 깊이 사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582년 9월 도승지로 임명받은 정철은 열 달 만에 다시 서울로 떠나게 된다. 정철이 서울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아는 그를 붙잡을 수도 쫓아갈 수도 없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에 낙담한 채 체념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한 강아의 마음을 눈치 챈 정철은 서울로 떠나면서 작별의 시를 주어 그녀의 마음을 위무한다.

 

一園春色紫薇花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재看佳人勝玉차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莫向長安樓上望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滿街爭是戀芳華 거리에 가득한 사람이 모두 네 고움을 사랑하네.

 

그가 남기고 간 시에는 강아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당부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좋은 낭군을 구해서 시집을 가 잘 살고 서울 장안의 자기를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담긴 시였던 것이다. 하지만 순진한 강아는 정철의 당부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를 향한 그리움으로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철부지 어린 나이에 정철을 만나 머리를 얹은 이후로 단 한순간도 그를 잊지 못했던 강아는 관기 노릇을 하면서도 언제든 다시 정철을 만나겠다는 열망으로 십년고절의 세월을 버텨낸다. 기생의 처지로 다른 남자의 유혹을 거부하며 수절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깊은 애모와 여심의 끝에 들려온 소식은 정철이 북녘 끝 강계로 귀양을 갔다는 기막힌 소식이었다. 정철의 귀양 소식을 들은 강아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야 정철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귀양살이를 하는 정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서둘러 행랑을 꾸리고 길을 나섰다. 작은 발로 삼천리 길을 걸어 강계로 달려온 강아는 위리안치되어 하늘 한 자락 보이지 않게 가시나무로 둘러싸인 초라한 초막에 홀로 앉아 책을 읽는 정철을 확인하고 눈앞이 어질어질해져 왔다. 정철의 초췌한 모습에 진주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며 그 앞에 엎드린 강아는 기쁨과 설움이 어우러져 통곡이 목구멍을 짓눌러 오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자기 앞에 엎드려 우는 어여쁜 여인을 본 정철은 당황하며 그녀가 누구인지 물었다. 정철이 강아를 몰라본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 강아는 십여 세 안팎의 어린 소녀였으니 성장한 강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유배지의 적소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이내 달이 떴다. 달빛 아래 엎드려 우는 여인을 보던 정철은 그네의 모습이 한 마리 백학처럼 느껴졌다. 울음을 그친 강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를 몰라보시는지요. 10년 전 나으리께서 머리를 얹어 주셨던 진옥이옵니다.” 

“네가 정말 진옥이더냐? 몰라보겠구나. 그런데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왔느냐?”

 

정철은 자신도 모르게 강아의 맑고 아름다운 모습에 끌려들고 있었다. 강아는 지난 세월동안 그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것과 그의 귀양 소식을 듣고는 적거생활을 보살피고자 부랴부랴 달려왔다는 것을 고백했다. 대 정치가이자 일세의 문장가인 정철의 유배 생활은 보기에도 가혹해 보였다. 그러나 정철은 실의와 비탄 속에서도 꼿꼿한 자세로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침침한 호롱불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강아는 정철을 앞에 두고도 정녕 믿기지 않았고, 정철은 강아를 볼수록 살풋한 여인의 향기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말을 잃은 두 사람 덕분에 방안엔 정적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조용히 강아가 입을 열고 어린 시절 정철에게서 듣고 외웠던 ‘사미인곡’과 ‘장진주’가사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꾀꼬리처럼 청아한 울림을 주는 소리였다. 기백 넘치던 정철의 얼굴이 놀라움과 기쁨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정철이 물었다.

 

“그것을 네가 아직도 외우더냐?” 

“예, 나으리께서 배워주신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나으리가 그리울 때면 가야금을 타고 마냥 불렀던 노래이옵니다.” 

 

강아의 뺨은 이미 붉은 홍시처럼 물들고 있었다. 그런 강아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철의 입가에도 빙그레 미소가 넘쳤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거나해진 정철이 입을 열었다.

 

“진옥아, 내가 한 수 읊을 테니, 너는 그 노래에 화답해야 한다.”

“예”

“지체해서는 안 되느니라.”

 

강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정철이 목청을 가다듬어 시를 읊는다.

 

옥玉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적실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탁월한 시인이었던 정철은 강아에게 흠뻑 빠져 노골적인 음사를 시의 옷을 빌려 내비쳤다. 번옥이란 분명 진옥을 은유한 것으로 남녀 간의 육체적 합일을 바라는 정철의 육정이 배어 있는 시였다. 지체없이 강아가 그의 시에 화답한다.

 

철鐵이 철鐵이라거든 석철錫鐵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마침 내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화답을 들은 정철은 탄복했다. 강아의 시는 당대의 대문장가인 정철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강아는 정철을 쇠로 비유하며 멋지고 견고한 남성을 만나면 자신의 골풀무로 흔들어 놓을 수 있다며 그에게 응수했다. ‘골풀무’이란 불을 피우는데 바람을 불어 넣는 풀무인데, 강아는 이를 '남자를 녹여내는 여자의 성기로 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만하면 글자 그대로 강아는 명기요, 뛰어난 시인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살송곳을 가진 멋있는 사내와 뜨거운 골풀무를 지닌 기생의 하룻밤은 뜨거운 정염으로 하얗게 무르익어 갔다. 이에 대한 일화는 시조집 ‘권화악부’에 ‘鄭松江 與眞玉相酬答’의 기록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날 이후, 정철의 적소 생활은 조금도 괴롭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강아는 늘 그의 곁에서 기쁨을 주었고, 가야금을 연주해 주었다. 그러면 헝클어진 정철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흘러들었다. 강아는 단순한 생활의 반려자 혹은 기녀가 아니었다. 정철에게 강아는 그 이상의 존재였으며 예술적 호흡을 가능케 만들어주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던 것이다.

 

정철은 유배지에서 부인 안씨에게 서신을 보낼 때면 강아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적어 보냈다. 부인의 서신 속에도 강아에 대한 투기나 남편에 대한 불평보다는 남편의 적소 생활을 위로해 주는 강아에 대한 고마움이 적혀 있었다. 불우한 남편의 생활 속에서 남편에게 위로를 주는 여자라면 조금도 나무랄 것이 없다는 부인의 글을 받고 정철은 고마웠다. 강아 역시 부인의 너그러운 마음을 고마워하며 더욱더 알뜰히 정철을 보살폈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뜨거운 애정의 강물이 마음 밑바닥으로 끊임없이 교류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애정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정철을 서울로 부른다. 정철은 유배지의 생활을 청산하는 기쁨과 나라에 대한 우국 그리고 강아와의 이별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강아의 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정철을 보내면서 강아는 아쉬운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오늘 밤도 이별하는 사람 하 많겠지요.

슬프다 밝은 달빛만 물 위에 지네.

애달프다 이 밤을 그대는 어디서 자오.

나그네 창가엔 외로운 기러기 울음뿐이네.

 

부인 안씨는 강아와 함께 서울에 올라올 것을 정철에게 권했지만 강아는 끝내 거절하고 강계에서 혼자 살며 정철과의 짧은 사랑을 되새기며 외로운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 12월 18일, 정철이 강화의 우거에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아는 이 세상에 정철이 없다는 가혹한 슬픔 앞에 몸부림치다가 홀연히 강계를 떠났다. 그리고 그 후 강아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송강마을에는 송강을 기리는 송강문학관과 더불어 강아의 무덤이 모셔져 있다. 무덤 앞의 묘비 전면은 ‘義妓江娥墓’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엔 다음 글이 새겨져 있다. 紫薇를 사랑하자 詩를 지어주고 강계로 귀양가 위리안치 중인 松江은 다시 소환되어 적진을 뚫고 남하하다가 적병에게 붙잡히자 결심하고 적장 小西行長을 유혹, 평양 탈환의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고양 신원의 松江 묘소를 찾아 강아와 정철이 남긴 일화는 강계 유배지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유배지에서 나눈 사랑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을 거점으로 강아가 의기로 활약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임진란 이후 강아의 행적에 대한 소상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강아가 난리중에 조국을 지키고 정철을 지키기 위해 적장 ‘소서행장’을 유혹하여 큰 공을 세우고 그 이후에는 ‘소심’이란 법명을 얻은 뒤에 입산수도했다는 일화에는 허구가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의기로서 강아를 조명한 예는 박종화의 역사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통해 보이는데 그것으로 강아의 행적을 모두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삼공을 지낸 대 정치가 송강 정철. 그의 일생은 크게 관로의 생활, 은거의 생활, 적소의 생활로 나눠진다. 그리고 강호에 유배되어 은둔생활을 하는 그에게는 그의 어두운 심연에 불을 밝혀준 강아가 있었다. 정철을 향한 애정으로 삼천리 먼 곳을 오르고 내리면서 그를 찾아온 강아의 구애는 결국 정철을 감탄시켰다. 정철은 강아와 시를 나누고 그녀의 문학에 대한 조예와 아름다움에 반했다. 요컨대 이들이 적소에서 나눈 사랑에는 단순한 육애만이 아닌 예술인의 깊고 깊은 교분이 존재했던 것이다.

 

애틋한 여심이 이루어낸 고귀한 사랑. 아마도 지금 강계의 땅에는 청산처럼 기대고 선 송강 정철과 강아의 혼이 슬프게 맴돌지도 모르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5.11.01 09:03 수정 2025.11.01 09:16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