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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과 태평양 사이 (34)
그날, 태평양으로 나가는 배에 올랐지
동해항의 바람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낡은 국제여객선은 다 허물어져 가고 있더군
살아서 빛나던 기억들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서
국제여객선 갑판 위에 올라 홀로 웃고 있었지!
육지에서는 자신마저 속이는 허세에게 무릎꿇지만
바다에서는 망설임 없이 고독에게 웃어 주었다네
쾌락을 참는 건, 설사를 참는 것보다 어렵다고
오래된 친구는 허허허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는 태평양 위에서
불온한 눈과 귀와 입이 만들어 낸 허상을
아낌없이 다 버리고 혼자 웃고 말았다네
나는 바다의 뒷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바다도 나의 뒷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고
칼날처럼 내리꽂히는 겨울바람을 뚫어내며
말없이 나를 태평양으로 밀어주고 있었다네

[전승선]
시인
자연과인문 대표
이메일 : poet1961@hanmail.net